역사에서 찾아보는 <왕의 남자>의 광대 '공길'과 연산군
흔히 '광대(廣大)'라고 하면 서양의 '피에로'나 서커스에서 활동하는 기인(奇人)을 떠올린다. 곧잘 웃음을 유발하는 행동을 보고 낮잡아 '광대짓 한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런 사람이나 행동을 '광대'라고 불렀을까. 우리나라에서 광대는 지금의 '연희(演戲)'라고 지칭되는 공연물, 예를 들어 풍물, 줄타기, 무동타기 등을 공연하던 전통예술인이다. 특히 조선 후기에는 판소리를 하는 소리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들은 모두 '천한 일'에 종사했기 때문에, 1970~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비하하는 말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소리꾼이나 연희자들에게는 자신의 정체성인 동시에 뛰어난 기량을 증명하기도 했지만, 사회에서는 경멸과 모욕이 담긴 욕이었던 셈이다.
전통사회에서 비록 양인 신분이었으나 이들에 대한 인식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기생, 백정과 더불어 대표적으로 멸시당하는 계층이었다. 또한, 이들은 그 기원이 여진, 거란, 달단(韃靼; 타타르/몽골) 같은 북방민족에 있어 고려시대와 선초에는 유랑하며 수렵생활을 하거나, 때로는 민가를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은 조선시대 사회로 편입되면서 유기장(柳器匠), 도축업자, 재인(才人:공연예술종사자) 등으로 분화되었다. 광대의 뿌리 중 한편에는 재인이 있다는 점이다. 이들을 포함해 광대와 재인은 음악과 재주 등 공연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실록과 고문헌에는 창우(倡優), 배우(俳優), 희자(戱者) 등으로 기록되어있다.
광대들은 민간에서 재주를 공연해 먹고사는 한편, 국가적 행사에 동원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나례(儺禮)와 임금 영접행사 등이 그것이다. 나례는 고대 중국 주나라에서 유래한 풍습으로, 연말에 궁궐에서 나쁜 기운을 쫓고 경사로 나아가는, 이른바 벽사진경(辟邪進慶)을 위한 행사였다. 황금색 눈이 네 개 달린 방상시[方相氏]를 비롯해 귀신을 쫓는 분장을 하고 각종 타악기를 치며 축귀(逐鬼)를 했다. 그런데 이러한 의식적인 측면은 고려 말기에 점점 약해지고 희(戱)적 요소가 강해지게 됐다. 나례가 끝나면 광대와 재인들의 각종 공연을 하기 시작했고, 대체로 왕과 왕비, 궁 내외의 왕족과 신하들이 참석해 관람했다.
대부분의 민속 자료가 그렇듯, 나례에서 광대들이 어떤 공연을 했는지 기록한 자료는 거의 없다. 다만, 몇 가지 특기할 자료가 있긴 하다. 그중에 대표적인 것이 『연산군일기』에 실린 '공길'의 이야기이다. 영화 <왕의 남자>와는 다르게 공길은 줄타기를 하거나 괴뢰(傀儡: 꼭두각시)를 하지는 않았지만, 『논어』를 인용해 연산군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아마 연극 형식을 취한 것으로 보이는 데, 노유희(老儒戲)이라 하여 늙은 유학자로 분해 블랙코미디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前略) 배우 공길이 늙은 선비 장난을 하며, 아뢰기를, "전하는 요순 같은 임금이요, 나는 '고요' 같은 신하입니다. 요순은 어느 때나 있는 것이 아니나 고요는 항상 있는 것입니다."하고, 『논어』를 외워 말하기를,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으랴." 하니,
왕은 그 말이 불경한 데 가깝다 하여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유배하였다.
-『연산군일기』 권60, 연산군 11년 12월 29일-
조선왕조 가운데 가장 난폭했다고 평가되는 연산군 앞에서 한낱 광대가 '당신 국왕으로서 자격이 없어, 똑바로 좀 하시오'라고 비판한 것이다. 결국 공길은 곤장을 맞고 유배를 당했다. 공길이 나례 후 공연한 때는 연산군 11년(1505) 12월 29일 경이다. 이보다 앞서 6년 전, 공길의 공연과 비슷한 내용이 이미 연산군 앞에서 공연되었다. 이름도 비슷했다. '공결'이란 배우였다.
왕이 나례를 인양전에서 구경하고, 전교하기를, "금일 나례를 구경할 때에, 우인 공결이란 자가, 이신의 '민농시'를 외우기를, [벼를 김매는데 오정이 되니 벼포기 아래로 땀이 떨어지누나. 그 누가 알아주랴. 소반 위의 쌀밥이 한 알, 두 알 모두가 신고(辛苦)인 것을]하고, 또 삼강령·팔조목 등의 말을 논하므로, 승전색을 시켜 묻기를, ‘네가 문자를 아느냐. 글은 몇 책이나 읽었으냐.’ 하니, 공결이 서서 대답하기를, ‘글은 알지 못하고, 전해 들은 것뿐입니다.’ 하고, 물러가 놀이를 하라 하여도 따르지 않았으니 자못 무례하다. 의금부에 내려서 형장 60을 때려 역졸(驛卒)에 소속시키라." 하니, 승지 등이 아뢰기를, "공결은 우인으로서 놀이하는 것을 알 뿐입니다. 어찌 예절로 책망하오리까." 하였다.
-『연산군일기』 권35, 연산군 5년 12월 30일-
공결이 기록 상 공길의 오자일 수도 있고, 혹은 광대들이 세습되기 때문에 둘 사이가 형제 또는 가까운 친척일 수도 있다. 공결이 공길이든, 서로 친척이든 그들이 연산군에게 던진 메시지는 분명하다. 임금이 제 역할을 잘 수행하지 못하며, 이는 곧 백성들의 고통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경시하던 업에 종사하던, 양인이지만 천인 취급을 받던 광대들이 국가의 지존인 임금에게 '돌직구'를 던졌다. 당연히 임금은 노발대발했고, 공길의 경우 실제 처벌로 이어졌다. 하기야 신하의 직언도 듣기 싫었던 연산군인데 광대의 말을 듣을쏘냐.
여기서 한 가지 짚어볼 점이 있다. 오늘날 대통령 앞에서 공연한다고 하면, 당연히 비서실이나 보좌진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아보고 부적절한 것은 제외하는 등 그 격식에 맞게 조정하는 게 당연하다. 왕조 시대에 임금 앞에서 하는 공연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다른 행사에서도 의금부와 군기시에서 감독했던 사실에 비춰보면, 공길이 읊었던 내용은 당연히 검사를 받았다고 추정한다. 그렇다면 공길과 공결이 던진 메시지는 신하들의 의견이지 않았을까. 그게 아니라도 최소한 그들도 공감하지 않았을까. 조선 명종조(1545~1567) 한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前略) 사신은 논한다. 임금은 구중궁궐에 거하여 정치의 잘잘못과 풍속의 미악을 들을 수 없으니, 비록 광대의 말이라도 혹 풍자하는 뜻이 있으면 채용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이것이 나례를 행하는 이유이다. 말세에 그 본뜻을 잃고 다만 기이하고 교묘한 기예로써 마음을 방탕하게 하니, 시행하지 않는 것만 못하다.
-『명종실록』 권27, 명종 16년 12월 29일-
말 그대로 구중궁궐에 사는 임금이 백성의 뜻을 알기는 어렵다. 그래서 때마다 광대를 통해 실정을 듣고 잘못된 것은 바르게 고치고, 현 상황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것이다. 광대가 임금에게 정치를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 여론을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연산군은 제 발로 그 기회를 차 버렸다. 결국 공길이 곤장을 맞고 유배 간지 채 1년도 안된 1506년 9월, 연산군은 폐위되어 교동에 안치됐다. 광대의 말을 무시하고 벌을 준 연산군, 그에게 어울린 최후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