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 사나이>를 읽고
상상 속에 파묻힌 적이 있던가
상상이 촉발한 모험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나타나엘의 이야기가 '모래사나이'다. 무서운 유령이 익숙해지지도, 내 마음속에 있는 소름 끼치는 모래 사나이의 모습이 지워지지도 않았고(p.13) 상상에 점점 더 몰두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우연히 <미키 7>을 읽으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칠 때 절망적인 상황을 직시하는 것이 좋을지 희망을 품는 것이 좋을지에 대한 질문이 생겼다. 이 책을 관통하는 상상력의 힘을 어떤 식으로 사용하는지는 역시 개인 차이였다.
나타나엘과 테오도어가 비슷하게 광기에 휩쓸리지만 테오도어는 광기에서 벗어난다. 마치 자본주의 세상의 불안정성이 지배하고 있는 와중에 모두가 불안을 느끼며 살지만 서로의 선택이 다르고 그로 인한 결과 또한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모든 세상에서 불안정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하라고 이 책은 이야기하는 것 같다. 비록 작품이 쓰인 시대적 배경이 낭만주의에서 계몽주의로 넘어가는 와중이라고 하더라도 지금 상황에 비추어봤을 때 비슷하게 읽히는 부분이 있어 고전이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어렸을 때 집착했던 무언가를 다시 마주함으로 인해 우리는 또다시 변하게 된다. 우리는 어쩌면 스스로 통제할 수 없을 것이다. 이때 나타나엘의 최후를 맞이하지 않으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생각에 잠기게 한다.
우리는 날마다 불안정성에 관한 뉴스를 접한다. 일자리를 잃은 사람도 있고, 일자리를 가져본 적이 없어 분노하는 사람도 있다. 고릴라와 민물알락돌고래는 멸종 위기다.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태평양군도 전체가 물에 잠긴다. 그러나 대체로 우리는 이런 불안정성을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에서 예외적 상황이라 여긴다. 불안정성은 체계에서 '예외'라고 말이다. 그런데 만약 불안정성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우리 시대의 조건이라면 어떨까? 아니, 달리 말해서 우리 시대가 불안정성을 인지할 단계에 이른 것이라면 어떨까? 불안정성과 불확정성, 또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무언가야말로 우리가 추구하는 체계성의 중심을 이루는 것들이라면?
불안정성은 타자들에게 취약한 상태를 말한다. 예측 불가능한 마주침은 우리를 변모시킨다. 우리는 우리 자신조차 통제할 수 없다.
<세계 끝의 버섯> p.51
상상으로 신화를 만들다
특정 인물이나 물건이 상상 속에만 존재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상상이 과도한 추측을 양산하게 되고 결국 본질을 흐리며 사실과 동떨어진 이야기가 세상에 돌아다니게 된다. '적막한 집'에 살고 있는 여자를 묘사하는(pp.79~80) 장면이 마치 신화 속 인물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우리도 노출을 꺼리는 특정 인물들의 삶을 지나치게 신화화하고 있지 않나. 특히 여성을 신화화하는 것은 남성의 시각에서 원하는 여성상을 규정함으로 인해 여성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고 대상화되는 사례라고 생각한다.
말이라는 게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스팔란차니의 딸 올림피아가 '모래사나이'에 등장한다. 그녀의 천사 같은 눈길이 지상의 그 어떤 언어보다 많은 것을 이야기한다고(p.59) 표현하며 언어로 인해 지상의 좁은 원 안에 갇혀있다고 표현한다. 어쩌면 말이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타나엘은 자기 이야기만을 올림피아에게 들려주었을 뿐 올림피아의 말 따위는 들으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들어주는 것에 큰 감동을 받았을 뿐이다. 세상에 그런 관계는 없다. 작가는 말을 하지 못하는 인물로 설정하면서 거꾸로 말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아래에서 얘기할 것처럼 고골의 '코'라던지 '외투'와 같이 어떤 특정한 것이 결여되어 있을 때를 우스꽝스럽게 그려내는 탁월한 작가의 시작인 호프만의 작품을 읽다 보니 무섭다기보다는 웃기다.
어둠을 밝히는 재치
무서운 분위기 일색인 소설을 읽는 와중에 재치 넘치는 문장을 보면서 웃음이 나오기 쉽지 않아 보인다. 어쩌면 그것 때문에 고골이 떠올랐을지도 모르겠다(나중에 보니 고골이 호프만의 영향을 받았다고 옮긴이의 말에 쓰여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재치 있는 문장은 일상적인 삶에 대한 설명으로(p.72) 코가 사방에 부딪히는 좁은 원 안에서 돌고 도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기이함을 껴안는 포옹력을 통해서, 내 삶을 경이로움으로 확장해 나갑시다.” 클럽장인 유지원 님의 마무리 정리멘트로 나도 마무리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기이함은 어쩌면 모두가 가지고 있는데 사회화과정을 거치면서 다듬어져 지금은 없어졌다고 생각하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최근 '파묘'와 같은 결의 아이들이 보는 '신비아파트'도 마찬가지로 기이하다. 정돈되고 단정한 것보다 이런 기이함도 일상에 함께 있다면 삶이 풍요로워질 것이라는 기대가 생기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