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very human being at every stage of history or pre-history is born into a society and from his earliest years is formed by that society. As has been well said, society and the individual cannot separated.
[2010년 6월 고2 전국연합 모의고사 24번]
선사시대부터 시작된 인류 역사의 매 단계의 모든 인간은 사회 속에서 태어나고, 유년기부터 그 사회에 의해 형성된다. 잘 알려진 대로,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이 이기적 유전자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낱 전달 기계일 뿐일지라도, 태어나자마자 늑대 소굴로 보내진 인간은 인간이 되지 못하고 늑대가 된다. 인간은 주어진 사회와 환경에 따라 변해야 한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당연하게 여겨졌던 영화판이라는 사회에 적응했던 나는, 그곳을 떠나 학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일원이 되었다. 영화판이 특전사, 해병대였다면 학원은 일단 보병 부대 수준일 것이라는 안이한 생각을 품었던 게 사실이었다.
학원에 처음 출근하는 날, 친구 A는 내가 혹시라도 학원에 대한 ‘반사회적 성향’을 보일까 봐 장시간 동안 학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에 대해 알려주었다. 친구 A의 말투는 당부와 걱정, 그 중간 어디쯤 해당되는 어조로 나에게 말했다.
“특별한 거 없다. 수업은 하다 보면 익숙해지니 큰 걱정 안 해도 되고. 대신에 네가 맡은 반 애들한테 잘해주고, 학부모 상담 잘하면 돼. 그래야 여기서 살아남을 수 있어.”
‘살아남을 수 있다’는 말은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이곳도 비장한 각오 없이는 살아남긴 힘든 생태계란 말인가. 내심 이곳에 오면 영화판의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인 생태계를 떠나게 되어 마음이 어느 정도 편안해질 줄 알았다. 꿈을 포기했지만 그 대신에 마음의 평화는 어느 정도 얻을 수 있겠다는 순진하고 막연한 기대는 학원 생활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무참히 깨졌다.
약육강식과 적자생존의 다윈주의가 한 치 오차 없이 적용되는 생태계. 피타고라스는 우주를 포함한 생태계의 질서를 ‘코스모스’라 했다. 동식물로 구성된 생태계는 코스모스여서 무리가 없다.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서로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며 살고 죽고 한다는 말이다. 인간으로만 구성된 생태계는 무질서가 질서다. 카오스가 코스모스다. 서로 반의어 관계인 단어가 어느 날 갑자기 동의어가 될 수도 있는 세상, 말도 안 되는 일이, 말이 되는 일로 뒤바뀌는 세상이 바로 인간만으로 구성된 생태계, 사회다. 정상적 생태계에서는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고, 개구리는 뱀을 먹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에서는 간혹 능력 없고, 누군가 뒤를 봐주는 (빽만 있는) 개구리가 뱀을 잡아먹어 버리는 일이 발생한다. 본능으로만 이루어진 자연에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이, 본능과 욕망으로 지배되는 인간사회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곤 한다. 비상식적이고 비이성적인 일들, 불합리하고 불공정한 일들이 마치 그것이 당연한 일인 양 일어나는 곳이 바로 사회란 것을, 난 영화판에서 일한 덕택으로 알게 되었고, 이내 익숙해지기까지 했다.
뱀을 잡아먹는 개구리는 잊을 만하면 내 앞에 나타났다. 감독의 제자라는 자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내 일을 빼앗아 갈 때도, 조감독의 같은 학교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받아 갈 때도, 난 익숙해서 괜찮았다. 오히려 더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에는 꼭 나한테 기회를 달라며 미소를 보일 수 있는 내공도 어느덧 생기게 되었다. 가진 게 없어서 힘이 없으면 정치라도 잘해야 했다. 실력은 중요하지 않았다. 아부와 권모술수, 중상모략을 자유자재로 적시적소에서 활용할 수 있어야 했다. 오로지 실력만으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을 볼 때면 과거의 나를 보는 듯해 순진해서 우스웠다. 머지않아 가진 게 없는 사람은 정치도 잘할 수 없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영화판이 나에게 가르쳐준 값진 선물이었다.
간혹 이런 영화판이 더럽다는 생각이 들 때도 없지는 않았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 이까짓 굴욕감쯤은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웃어넘길 수 있어야 된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소주 한 잔 기울이며 주제넘게 무슨 생각이냐, 선 넘지 말자라고 스스로를 다그쳤다. ‘선을 그을 수 있는 자만이 선을 긋는다. 그것을 넘지 말고 그 안에서 놀아야, 나도 그 선으로 들어갈 수 있고, 언젠가 내가 그 선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가 이 생태계에서 가진 나의 신념이었다.
영화일을 포기하니 당연히 그 신념 또한 사라졌다. 먹고살아야 하고, 빚을 갖아야 한다는 생각은 어떠한 긍정적 에너지도 나에게 주지 못했다. 좋아하는 영화는 이제 취미로 남겨두자. 열심히 살아서 빚도 갚고, 결혼도 하고, 아이도 가지고, 그렇게 평범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자. 내 안의 지킬은 나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 사고를 주입시키려 애써 노력했다. 지킬의 응원 덕에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억지로 힘을 내보려 해도, 결국 내 안의 하이드는 그 주먹으로 애꿎은 벽만 치며 신을 포함한 다른 누군가를 탓하는 한심한 짓거리를 하게 했고, 난 순순히 이를 따랐다. 패배감과 상실감이 혼합된 생전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정은 나를 무기력하고 우울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학원의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원장 밑으로 영어과, 국어과, 수학과, 과학과, 사회과 팀이 있었고, 각 팀장 밑에 각 과 강사들이 평균 5명씩 있는 구조였다. 자리를 배정받고, 영어과 첫 번째 회의를 들어갔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내용만 가득했던 회의는 생각보다 오래 지속됐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기보다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영어과 팀장의 질책과 잔소리만 가득했다. 회의 중 다른 영어 선생님들의 표정을 틈틈이 관찰했다. 다들 자신 앞에 놓여있는 회의록만 쳐다보고 있었고 초점은 흐렸다. 나와 마찬가지로 다들 빨리 회의가 끝나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드디어 잔소리 연설은 끝났지만, 팀장은 나만 회의실에 남게 했다. 팀장은 회의 중에는 앞으로 껌을 뱉고 들어오라고 했다. 회의록 한 귀퉁이를 찢어 거기에 껌을 싸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팀장은 잘 가르쳐 줄 테니, 시키는 대로 잘하라고 말했다. 자기가 하라는 데로만 하면 금방 월급도 올라갈 거라며 내 어깨를 툭툭 치면서 잘해보자고 말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조감독이랑 똑같은 사람이 여기에도 있었다. 여기도 생태계임을 또 한 번 절실히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러고 보니 팀장의 튀어나온 배와 눈은 개구리를 쏙 빼닮았다. 친구 A는 영어과 팀장이 원장의 조카라고 말해줬다. 실력도 별로고, 학생들한테 인정도 못 받지만 원장과 함께 학원을 움직이는 실세라는 말도 덧붙였다.
'네포티즘(nepotism)'은 족벌주의, 친족 중용주의를 뜻하는 말이며, 조카를 뜻하는 라틴어 ‘nepos’에서 왔다. (영어로 남자 조카는 nephew, 여자 조카는 niece다.) 16세기와 17세기의 교황들은 자신의 조카(혹은 교황의 비밀스러운 사생아)를 추기경이나 고위직에 임명함으로써 권력을 세습하여 유지하려 했다. (교황은 공식적으로(?) 결혼을 할 수가 없어서다) 부정부패와 정실 인사가 자행되면서 차츰 각계각층으로부터 비판과 개혁의 요구가 끊이지 않았고, 결국 17세기 말에 이르러서야 이 관행은 금지되었다. 현대 사회에서 네포티즘이 북한과 일부 재벌들한테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한국 사회를 잘 모르고 하는 말이다. 학연, 지연, 혈연은 한국 사회의 또 다른 와이파이다. 물론 자기들만 쓸 수 있는 비밀번호는 확실하게 설정해 놓고, 남에게는 잘 알려 주지 않는다. 비밀번호를 모르면 뻔히 핸드폰에 잡히는 온갖 와이파이들은 다 무용지물이고 그림의 떡이다.
원장과 개구리 팀장은 둘 만 아는 비밀번호로 같은 와이파이를 쓰고 있었다. 다른 팀장들도 배제하고 둘이서만 원장실에서 이야기를 나눈 후에, 개구리 팀장은 다른 팀장들을 소집시켜 업무를 지시하고, 영어팀 회의를 주재했다. 한 학기, 한 달 단위 계획 따위는 없었고, 길어야 봐야 한 주, 혹은 그날그날 떨어지는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주먹구구식의 운영이 주를 이뤘다. 당면과제라고 해서 별 다를 것도 없었다. 전날 있었던 학부모의 콤플레인에 대응하는 일이거나, 아직까지 누가 원비를 내지 않았으니 전화로 독촉하라는 내용이 거의 전부여서, 원장과 개구리 팀장이 원장실에 들어가서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쉽게 감 잡을 수 있었다. 개구리 팀장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꼰대 캐릭터 그 자체였다. 여자 강사들의 옷차림을 신경 쓰며 사사건건 간섭했고, 시의적절치 못한 농담으로 분위기를 펭귄도 살아남지 못할 남극으로 만들곤 했다. 학원에서 근무한 지 오래된 몇몇 강사들은 개구리 팀장에게 꼼짝도 못 하고 굽신거리는 행태를 보였다. 강사들은 다들 원장과 개구리 팀장에게 순응하는 분위기였다. 친구 A의 말에 따르면 다른 학원들은 월급을 제 때에 넣어주지 않는다고 말했다. 회사원은 월급으로 산다. 하루라도 늦으면 피가 말라 온 몸에 힘이 빠져 아무 일도 못한다. 어느 직장이 좋은 직장인지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요건은 월급을 제 때에 넣어주는지를 알아보는 일이다. 이를 지키지 못하는 사업체와 운영자는 그 어떤 변명도 필요 없는 쓰레기다. 친구 A는 오래간만에 목청을 높여 침을 튀겨가며 열변을 토했다. 전에 있던 학원에서 크게 디인 경험이 있었나 보다. 적어도 이 학원은 월급만큼은 안 밀린다고 했고, 다른 학원에 비해 월급도 높은 편이라 말했다. 강사들은 무시할 수 없는 돈이라는 가치에 아니 꼽고 부당한 것들을 감내하거나 무시하거나 순응하는 전략을 택한 것으로 보였다. 순응은 영어로 conformity이며, 대체적으로 아무런 비판 없이 무언가를 수용하고 따른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인다. 이곳에 와서 순응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명사로서 순응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부당한 것을 참아내야 하는 애잔한 마음 상태를 뜻하는 단어였다. 강자에게 순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생태계도 영화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도 순응을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당함에 용기 있게 맞서 싸워야 하는 것 인가. 개구리 팀장은 나에게 한 학부모당 한 달 기준 세 번 이상 상담을 해야 한다고 지시했다. 다른 강사들과의 소통도 부담을 느꼈던 나에게 생전 얼굴도 모르는 학부모와 상담을 하라 했다. 극심한 짜증이 몰려왔다. 학원 강사들은 2시에 출근, 10시에 퇴근했다. 첫 수업은 5시 30분이었고, 출근과 첫 수업이 시작되는 공백은 명목상 수업 준비와 상담을 위한 시간이었지만, 사실 상담만을 위한 시간이었다. 그 시간만 되면 학원 강사들의 ‘어머님~’이라는 자신이 가진 목소리보다 훨씬 높고, 가늘어진 콧소리가 교무실을 채웠다. 한두 시간 동안 쉴 새 없이 상담한 강사들은 상담기록을 세세하게 기록해 개구리 팀장에게 가지고 가 결재를 맡았다. 개구리 팀장은 그런 강사들에게 ‘참 잘했어요!’라는 도장을 찍어주듯 결제란에 사인했다. 상담내용은 하나같이 비슷했다. 마치 미리 짜 놓은 대본처럼 진행됐으며, 그 대본은 아무리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도 줄 수 없을 정도로 진부했고, 가식적이었다.
“OO가 요즘 수업태도가 많이 좋아졌어요.”
“OO가 요즘은 학원생활에 잘 적응해서 공부 열심히 하고 있어요.”
“OO가 성적이 이번에 많이 오르지 않았지만, 이대로만 하면 이번 기말고사에 분명히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아요.”
“OO가 기본기가 아직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다행히 OO가 이 학원을 좋아해서, 꾸준히만 다닌다면 곧 좋아질 거예요.”
전부는 아니었지만, 대부분 강사들은 거짓 상담을 하고 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지만, 학생에 대한 진심 어린 관심이 느껴지는 상담은 없었고, 그들의 상담은 오로지 학원 매출을 늘리거나 유지하기 위한 고객관리 차원의 상업적 립서비스에 불과했다. 스무 명 정도의 학생 상담기록을 놓고 비교해 본다면 1주일 단위로 서로 교차하면서 결국은 같은 내용들이었다. 강사들은 교묘하고 영리하게 상담내용을 기록했고, 원장과 개구리 팀장은 이를 알아차릴 정도로 현명하지는 않았다. 원장과 개구리 팀장이 그어놓은 선을 감히 넘어가 보려고 시도하는 강사는 한 명도 없었다. ‘상담이 너무 많다. 꼭 필요한 학생들과 학부모에게만 상담 전화를 돌리자’라고 말하며 건의하는 강사는 없었다. 내가 근무하기 전, 아마 누군가 그렇게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다만 원장과 개구리 팀장은 이를 어떠한 이유로 묵살했을 것이다. 굳이 경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는 합리적 추측이었다. 다들 포식자가 만들어 놓은 일방적 질서 안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생존하는 힘없는 약자일 뿐이었다. 비합리적인 지시를 맹목적으로 따르고 싶지 않아서 한동안 난 상담을 하지 않았다. 친구 A는 ‘다 하니까, 너도 해라’라는 식으로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오히려 그 말에 반감은 더욱더 심해졌다.
개구리 팀장은 왜 상담을 하지 않느냐며 나를 다그쳤다. 하기 싫은 일을 하지 않는 방법은 이곳을 떠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딱히 다른 대안이 없었다. 새로운 일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았고, 적지 않은 에너지가 소모될 것 같아 그마저도 귀찮게 느껴졌다. 이곳에 날 소개해준 친구 A의 호의를 ‘둘리’로 착각하고 ‘얼음별’로 도망가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 생각했다. 적당한 핑계를 대며 둘러대는 방법으로 일단은 버틸 때까지 버텨보자 마음을 먹었다. 전화를 했는데 받지 않아서 못했다. 내일 하겠다. 하긴 했는데 별 다른 내용이 없어서 아직 상담을 기록하지 않았다. 변명거리를 순식간에 만들어 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개구리 팀장은 상담을 더 신경 쓰라는 말을 웃으며 해주었다. 그의 웃음은 나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음을 감추기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개구리 팀장은 내 옆에 와 앉더니 자신이 보는 앞에서 상담을 해보라 했다. 내가 싫은 내색을 보이자, 원장이 시켜서 하는 것이라 자신도 어쩔 수 없다며 ‘어서 전화를 걸어라’는 눈빛과 함께 수화기를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개구리 팀장과 내가 만들어 낸 마찰열은 교무실을 전체를 데우기 시작했고, 다른 강사들 또한 그 열기가 주는 긴장감을 함께 느끼는 듯했다. 반항의 의지를 단호하게 보여 위기를 모면해야 했다.
“다음에 꼭 하겠습니다.”
팀장은 더 단호했다.
“아니오. 지금 하세요.”
주위를 한번 둘러봤다.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몰려오는 굴욕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살기 위해서는 현실과 타협해야 했다.
수화기를 건네받으면서 콧소리로 ‘어머니~~~ㅁ’이라는 표현은 절대 하지 말자 다짐했다. 복식호흡으로 단전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깊고 낮은 저음의 목소리로 ‘나는 너희들과 다르다’를 팀장과 다른 강사들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다. 전화를 걸기 전 해당 학생을 머릿속에 떠올려봤다. 공부를 잘할지, 못 할지는 내가 판단할 문제가 아니어서 상담 내용에 제외시킬 것이고, 앞으로 이 학원에 계속 다녀야만 성적이 오른다는 말도 하지 않을 것이다.
첫인사는 무난했다.
“안녕하세요. 학원입니다.”
학부모의 예상된 질문이 이어졌다.
“우리 아이 요즘 어떤가요?”
지금부터다. 여기서부터 난 달라야 한다.
“C학생은 태권도 도복을 입고 항상 학원에 옵니다.”
일부러 개구리 팀장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책상 앞에 붙어 있는 학원 시간표만 뚫어져라 응시하며 통화를 이어갔다.
“네! 아... 그래요? 하하. 태권도 끝나고 바로 그쪽으로 가는 거라서 그래요. 요즘 C는 수업내용 잘 따라가고 있나요?”
절대로 립서비스는 하지 않을 것이라 다짐한 나였다. 진실은 항상 고통스럽다. 학부모도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진실을 아는 편이 궁극적으로 더 좋은 일이라는 판단은 나에게 좀 더 적극적이면서 더 큰 목소리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요즘 수업시간에 계속 졸고, 간혹 깨어 있을 때는 옆에 애들이랑 많이 떠드는 편입니다.”
C학생의 어머니는 아주 잠깐 말이 없다가, 그럴 땐 꼭 따끔하게 혼내달고 부탁했고,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통화를 끝냈다.
“상담을 그렇게 하시면 어떡합니까?”
개구리는 옆에서 한동안 계속 울었다. 난 신고 있었던 닳아빠진 신발 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속으로 말대꾸를 계속했다.
“전에 뭐하다 왔어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상담을 한 번도 안 해 봤어요? (네, 학원은 처음이니까요.) 그런 식으로 상담하면 어떻게 해요? (어떻게? 뭘 어떻게?) 이렇게 상담해서야 되겠어요? (안될 이유라도 있나요.) 이렇게 하면 아이들이 학원 다 그만두게 생겼어요! (......)”
개구리 팀장은 내 전화기로 다시 그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고, 새로운 강사가 아직 뭘 몰라서 상담이 서툴렀다며 연신 사과했다. 전화를 끊고, 개구리 팀장은 짧아 보이는 혀를 끌끌 차며 드디어 내 옆자리를 떠났다. 친구 A가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원래 저래. 네가 이해해라.”
그날 밤, 고시원 방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면서 초등학교 시절에 했었던 개구리 해부 실험만 생각했다. 두 병째 들어가면서부터는 개구리 생각이 나지 않았다. 작은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을 우연히 본 이후부터는.
거울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쓰레기통은 이미 쓰레기로 가득 차서 거울을 받아먹지 못하고 내뱉었다. 쓰레기통을 비우러 방문을 열고 나갔다. 고시원 총무와 마주쳤다. 고시원 총무는 제발 새벽에 발소리 크게 내면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리고 비우는 김에 여기 쓰레기통도 같이 비워달라고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총무의 쓰레기통 밑바닥에 있던 믹스커피봉지가 떨어지지 않아서 직접 손으로 다 뗐고, 남은 커피 자국을 지워야 할 것 같아 수세미로 닦아 물로 헹군 다음 총무실에 갖다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