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칠리아 여행
호스트 가브리엘라에게 에트나 산에 대해 물어봤다. 그녀는 가이드와 함께 에트나 산에 오를 수 있는 투어 프로그램을 소개했다. 카타니아에서 에트나 산까진 멀지 않아 버스를 타고 가도 되지만 가이드 동반이 편할듯해 예약을 부탁했다. 이른 아침 숙소 앞에 도착한 가이드 파블로. 이날 투어에는 스페인, 이탈리아, 미국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이 참여했다. 차를 타고 곧게 뻗은 도로 위를 달리며, 파블로는 쉴 새 없이 에트나 화산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에트나는 안심해도 좋지만, 검은 연기는 위험 신호라고 했다. 저 멀리 끊임없이 흰 연기를 뿜어내는 에트나가 보였다.
에트나 산이 가까워지면 누구나 알아챌 수 있을 것이다.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풍경이 짙은 흑색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거무죽죽한 흙더미가 끊임없이 펼쳐지는 풍경을 보며, 이곳이 화산 지대임을 깨닫는다. 차는 중간에 딱 한 번 멈춘다. '용암에 집이 파묻힌 곳' 현장인데, 말 그대로 화산이 폭발하면서 용암이 집을 그대로 덮친 흔적이 남아있다. 영화로만 봐왔던 일이 실제 여기서는 실제로 벌어졌을 것이다. 에트나 산에서 화산 폭발은 오래전부터 600여 차례나 된다고 한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카타니아까지 미쳤다. 화산 때문에 수없이 도시가 파괴되고 복원했다는 이야기들이 이제야 와 닿는다.
차가 멈춘 것은 산 위를 한참 오르고 난 후였다. 산 중턱, 해발 약 2,000m 되는 곳에 공영 주차장이 있고, 여기서부터 에트나 산의 본격적인 탐방을 시작할 수 있다. 에트나 산은 해발 3,340m의 유럽 최대 활화산이다. 관광이 허용된 지점은 2,800m까지로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곤돌라를 타고 2,500m까지 오른 후 다시 지프를 타고 올라야 한다. 파블로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의견을 물었다. 끝까지 갈 순 있지만, 추가 비용 60유로를 더 내야 한단다. 나는 조금 솔깃했는데, 다른 참가자들 모두 단호하게 안 하겠다고 해서 대세에 따르기로 했다. 후에 화산섬 스트롬볼리에 갈 예정이기에 지금 아쉬움은 그곳에서 달랠 것이라 다짐하며.
우리 투어팀은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곤돌라로 올라갈 수 있는 지점까지 걸어 올라가기로 한 것. 물론 길이 매끄럽진 않았다. 밑창이 두꺼운 운동화를 신었지만 부드러운 흙에 발이 빠지기도 여러 번. 그럼에도 직접 오르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광활한 에트나 산의 흔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어서다. 에트나는 신비로운 곳으로 여겨져 그리스 신화의 배경으로도 자주 등장한다. 대장장이신 헤파이스토스의 대장간이 있는 곳, 100개의 뱀머리를 한 티폰을 제우스가 가둬둔 곳으로 등장했다. 그만큼 오래된 세월, 많은 사람이 에트나에 대한 두려움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 비옥한 화산성 땅이 실은 농사짓기에 적절해 산 인근에 포도 밭이나 과수원도 많다고 한다. 죽음과 생명의 땅. 상반된 두 얼굴을 지닌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최종 목적지는 이곳이다. monte escriva eruzione 2001이라는 이름이 붙은 봉우리다. 2001년도에 화산이 분출되었던 곳으로 움푹 들어간 거대한 구멍을 볼 수 있다. 생각보다 굉장히 넓어서 한 바퀴 도는데도 시간이 좀 걸린다. 게다가 이 정도 높이에 올라서니 기온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구름이 잔뜩 끼기 시작했다. 단단히 채비를 하고 왔음에도 추위가 느껴졌다.
봉우리 한 바퀴를 돌고 이어지는 길을 따라오니, 어느새 산에서 내려오는 길이다.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추위와 뿌연 안개구름, 검은색의 땅이 기억난다. 나중에 결국 스트롬볼리를 못 가게 되었으니 에트나 산 끝까지 못 가본 것이 후회로 남지만, 또 한 번 시칠리아를 가기 위한 여운을 남겨두었다 생각한다.
다음 코스로 가기까지 30분간 쉬는 시간이 있어서 기념품점에 들렀다. 에트나에서 직접 용암을 떠서 만들었다는 돌로 된 기념품이 있었고, 꿀이 유명하다더니 다양한 맛을 첨가한 꿀도 있었다. 에트나 화산이 폭발하는 순간이 담긴 엽서 몇 장과 레몬향 꿀 한 병을 샀다.
차를 타고 산을 내려와 한 동굴에 들렀다. 화산 동굴 Grotta dei Tre Livelli로, 1792년에 분출한 용암 때문에 생긴 동굴이다. 이 동굴은 여러 코스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상부 길은 60m 정도 된다고 한다. 입구 근방만 돌아봤다. 동굴 탐험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용암이 흘렀다는 상상을 하니 조금 색다르게 느껴졌다.
동굴을 본 후 마지막 코스는 단체 관광객이 갈만한 꿀 대형 판매점이었다. 나는 꿀을 미리 샀기에 구경만 했는데, 몇 병씩 사 가는 사람이 많았다. 돌아오는 내내 노곤함이 느껴져 차에서 졸았던 것 같다. 카타니아에 도착했을 땐 늦은 오후였다. 하릴없이 거리를 돌아다녔는데, 며칠 안된 카타니아지만 한 달 내내 살았던 것처럼 익숙했다. 여행 온 도시에 익숙해지는 건 기분 좋은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