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리생각 Nov 06. 2019

공정함에 대하여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기회는 평등할 것이며, 과정은 공정할 것이며,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고 다짐했었다. 이 레토릭은 불평등과 불공정과 불의로 점철되어 있는 현실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을 주는 샘물과 같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이와는 어울리지 않는 반칙과 편법이 별 거리낌이 없이 점철되었던 한 개인의 삶이 공적 영역으로 등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은 배신감과 허탈감을 느껴야 했다. 더구나 사회를 향해서는 '공정'을 외치면서 개인의 삶에 있어서는 적당히 타협하거나 적극적으로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행태가 여느 기성 정치인들에게서가 아니라 '정의'의 나팔수를 자임하던 당사자에게서 드러났기 때문에 그 반향이 가열찼던 것이다. 이상주의가 그의 머릿속에서만 '관념'으로 맴돌았을 뿐 그 삶에는 전혀 녹아들지 못한 결과이다. 요컨대 그는 공정과 정의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남들보다 똑똑한 방식으로 그것들에 대해 논점을 제시할 수 있었지만 공정과 정의에 대해서 아는 것과 그것을 실제 생활에서 구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가진 기득권을 향유하는 것과 정의를 실천하는 것은 같이 갈 수 없는 것이다. 기득권이 정의롭지 못하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에 터 잡은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삶에 공정하지 않은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결과'가 정의로울 수 없다는 이야기다.  누가 '정의'를 주창할 때 사람들은 그의 입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성직자가 신앙적 교리를 설파하면서 정작 자신의 삶에는 세속주의가 넘쳐나는 경우도 매한가지다. 한마디로 '위선'이고 그 결과는 '추락'이다. "자신의 주장과 실제 생활이 상충되면 부정되는 것은 주장이다."



  

공정함은 '저울'로 재는 것이다. 같은 잣대로 재야 한다는 얘기다. 대상에 따라서 재는 잣대가 달라지면 공정함은 훼손되고 강자의 정의(?)만 남게 된다. 대학입시에서 '정시'와 '수시'를 놓고 어느 쪽이 더 공정한가를 가지고 논란이 분분하다. 성적순이 아니라 학생을 종합적으로 평가하겠다는 학생부종합전형의 불공정은 학생들을 재는 '저울'이 저마다 다르다는 데 있다. 대학들은 저마다 다른 저울을 '학생선발권'이라 주장한다. 제 입맛대로 뽑겠다는 얘기다. 그 입맛을 맞추기 위한 끝도 없는 스펙 경쟁으로 학생들과 학부모들을 몰아가고 있고, 남들과는 다른 잣대를 들여대라며 '차별화'를 추구한다. 몇 해전 모 전국단위 자사고 입학설명회를 갔다가 아연실색한 것은 중학생들을 상대로 한 면접 질문의 예시다. "존 롤스의 정의론과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을 비교하고 한국 사회에 대한 실천적 함의를 설명하라"는 것이었다. 기가 찰 노릇이다. 요즘 '정의'와 '공정'에 대해 목소리를 키우고 있는 대학생들에게 던져도 제대로 된 답이 나오기 어려운 문제이고 글 좀 쓴다는 일간지의 논설위원들에게도 쉬운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런 문제를 냈었다고 으스대는 입학담당 선생의 의도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자기소개서 컨설팅을 받아 그런 수준의 예상문제들을 답변할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킬 수 있는 부모를 둔 학생들만 지원하라는 이야기로 들렸다. 대학교에서는 이러한 입시설명회를 하지 않으니 면접에서 어떤 수준의 질문들이 제시되는지는 모르겠으나 학교생활기록부에 스토리를 입히고 차별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앞서의 질문에 답변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는데 들어가는 것 이상의 공임(?)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 실상이다. '정시'가 그나마 공정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과거의 통계에 따르면 고소득층의 자녀들에게 유리한 전형이라고도 한다. 여기서는 재는 잣대는 같아져 '공정'에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지만 기회의 차별이 문제가 된다. 즉 '공정'의 문제라기보다는 '형평'의 문제가 남게 되는 것이다. '기회균등'이란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관념'이다. 정확히 기회가 균등한 것은 제비뽑기 밖에 없다. 그래서 과거 중. 고등학교의 입시가 없어지고 '뺑뺑이'가 등장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대학교 입시를 '뺑뺑이' 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답을 찾기가 요원하다.




기업에서 직원을 채용할 때 '공정'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생각해본다. 얼마 전 공기업과 금융회사들에서 채용비리들이 적발되었고 '인사청탁'을 놓고 법정공방이 한창이다. 공기업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것이니 '공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이해가 가지만, 사기업은 비즈니스를 하는 곳이고 비즈니스를 위해 '불공정'을 감수할 수도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학벌이 높다고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입사 점수 높다고 일을 잘한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대학교 성적, 외국어 성적, 입시고시 성적 등을 가지고 줄을 세우는 것이 타당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청년실업이 문제가 되면서 '공정'이 이슈가 된 것이겠지만 채용은 학생 선발과는 다른 일이다. 이러다가 사기업에 '기회균등 전형'까지 등장하지 않을까하는 생각까지 든다. '채용비리'는 그것이 '대가성'이 되었을 때의 문제이고 그것도 '청탁'이 공공 쪽에서 되었을 때로 한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역으로 사기업의 입장에서는 '공정'하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사기업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모럴을 지키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소비자행동으로 대응해야 할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좋은 상품과 서비스로 소비자의 가치를 제고하는 것이 기업의 사명일진대, 그 과정에서 윤리의 문제가 발생할 수 도 있겠지만 윤리경영의 수준을 어디까지 할 것인지는 기업의 선택인 것이다. 공기업과 사기업을 같은 잣대로 재는 것은 '형평'에 어긋나는 것이다. 게임의 룰이 다른 곳이라는 이야기다.




'조국가족'에만 엄정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공정'하지 못한 일이다. 그러니까 검찰이 '정치'한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고 '검찰개혁'의 필요성을 스스로 나발부는 형국이 된 것이다. 견제받지 않는 권력 그 자체가 '불공정'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책임과 권한의 불균형이 극대화된 부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현대 사회는 아무런 위험도 부담하지 않는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그 결과가 낳는 폐해는 고스란히 사회에 부담이 되기 때문에 사회시스템은 학습을 멈춘다." 나심 니콜라스 탈레브가 그의 신작 '스킨인더 게임'에서 한 이야기다. '불공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학습을 통한 성장'을 막는 기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자연의 햇빛조차도 모두에게 '공정'하게 비치지 않고 있는 것이 현실이지만 최소한 '권력'에는 공정함이 전제되어야 할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