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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커피탄 리 Nov 20. 2024

복음을 전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복음을 전하기가 왜 이렇게 어려울까? 복음을 전하려 하면 나도 모르게 움칫하게 되어 버리거나, 조심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복음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아니다. 복음을 풀어 말하면 기쁜 소식인데, 기쁜 소식이 잘못되었을 리 없다. 대학시절, 내가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 중에는 예수는 좋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를 전하는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들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복음을 전하는 자가 겪어야 하는 생리가 아닐까.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으니까 말이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태복음 5:11) 그런데 착각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행실이 좋지 않아서, 그 사람은 물론 복음의 주인까지 욕을 먹이는 경우가 있다. 이는 한국 교회의 비행으로 한국교회를 현재까지 욕먹게 하는 경우로, 코로나를 거쳐 성도 수가 급감한 데에 큰 원인이 된 것이다. 이 이유로, 교회 내부에서는 회개를 위한 촉구의 목소리가 그리도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기도의 영성을 회복해 회개 이전으로 돌아가지 말자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쉬운 일일까? 모든 것이 회복되면 복음을 전하려는 움직임이 교회 내부에서 자발적으로 생길 것인데, 공중권세 잡은 자가 좋아할 리 없다.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한국교회의 재건설을 필사적으로 막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권세보다, 힘보다, 다른 어떤 무엇보다, 우리 하나님의 손아귀 힘이 더 크시다는 것을 안다. 성도들은 기도하기를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성도 된 우리는 복음 전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에게, 요즘의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요즘처럼 공허하고, 그로 인해 방황하는 이 많고, 또 그로 인한 정신질병들이 많은 사회, 건조한 들바람이 불어 피부까지 말라 들어가는 시대에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아직도 연탄으로 방을 덥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의 결과물이듯이. 불치병이나 큰 병에 걸려 치료할 돈이 없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돈이듯이. 공허하고 외로운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이다. 예수님은 왜 사람들에게 오셨으며, 결론적으로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희생하셨을까? 사랑 때문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 교회가 무엇보다 앞세워야 할 것은 바로 사랑을 행하는 일이다. 고린도전서 13장 전체를 인용할 필요도 없이, 첫 구절만으로도 독자인 우리는 알 수 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 13:1) 만약 교회가 사랑하는 일을 미루고, 그 반대급부인 자기 유익을 구하는 일에 취해 스스로의 영혼을 점차 파멸시킨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회복시키는 일을 더디게 하실 것이다. 17권에 달하는 선지서의 초점이 그것 아닌가. 사랑을, 즉 공의를 실천하지 않아서, 북이스라엘과 남유다를 멸망시키신 것 아닌가. 공의를 행한다는 것은 참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가장 가깝게는 가정에서 찾을 수 있다. 가정에서 가장 소외된 한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가정의 범위를 넘어선다면 직장, 학교, 거리, 교회 등이 그 장소가 될 수 있다.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0)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곧 당신 자신에게 한 것이라고. 사랑의 행위는 무엇일까? 어떤 사람에겐 다가감 일수도 있고, 어떤 사람에겐 만원 지폐 한 장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될 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이해의 끄덕임 일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원수를 용서한다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우리에게 죄를 지은 누군가 우리에게 용서를 구했을 때, 용서해 주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위해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기리는 일이다. 이 모든 것이, 그 외에 많은 행동들이 당사자인 사람들에게는 복음, 곧 기쁜 소식일 것이다.
 한편, 사랑을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받는 것만을 바라서는 안 된다. 받는 것에 익숙해지게 되면, 주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 조금만 이전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아도 서운해하게 된다. 감사의 기쁨을 잊게 된다. 받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은,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하며, 자신도 그 받은 사랑을 흘려보내야 한다.
 다시 사랑을 주는 입장으로 돌아와서, 만약 교회가 그런 움직임을 보인다면, 교회가 넘치도록 받은 사랑을 다시 흘려보내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여기서 교회란 교인된 자 개개인을 말한다.) 잘 감당한다면, 말 그대로 사랑의 복음의 사도가 된다면, 교회가 다시 세상으로부터 칭찬받고, 사람들이 모여들어 한 분 밖에 안 계신 주를 찬양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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