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한국 드라마나 웹툰에서 인생을 다시 살게 되는 회귀 내러티브가 자주 보인다고 한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는 건 이미 늦은 것 같고 다시 인생을 살아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바람에 부응하는 내용이지 않을까 싶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특히 우울할 때나 동기부여를 잃을 때 그렇다. 날씨 때문인지 요즘 가끔 우울모드가 켜진다. 그간 며칠 맑았다가 다시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가 시작됐다. 내내 흐리고 얇은 빗줄기가 계속되니 맘이 흐리곤 하다.
아니, 사실은 며칠 전에 들은 선배의 취업소식 때문인 것 같다. 나보다 박사를 1년 일찍 시작한 선배는 미국에서 공부했고 이번에 미국 대학에 Assistant professorship(조교수?)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미국과 독일의 아카데미아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겉으로 보이는 직함은 벌써 교수가 아닌가. 뭔가 맥이 빠졌다. 난 언제나 제대로 된 타이틀을 가져보려나.
처음 독일에서 박사를 시작했을 때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시작한 것 같다. 독일 박사에 대한 정보도 별로 없었고 박사학위를 따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는 채로 시작했다. 그리고 다행히 박사 1년 차에 DAAD에서 장학금에 합격했고 지난 3년 동안 돈 걱정 없이 공부했다. 인문학에서 (사회과학도) 독일어를 할 줄 모르는 외국인이 돈 걱정 없이 박사과정을 진행했다는 건 운이 좋은 편에 속한다는 걸 알고 있다.
올해로 4년간의 장학금이 끝이 나게 되는데 아직 논문은 끝내지 못했다. 이건 정말 큰일이다. 다행히 새로 들어간 프로젝트에서 6개월간 장학금을 주기로 했지만 어쨌든 미래가 불투명한 건 비슷하다. 갓 박사학위를 딴 사람에게는 독일 아카데미아도 불안정하기는 매한가지다. 만약 학교에 남아 가르치고 싶다면, 우리 과를 예로 들자면 박사학위 이후엔 포닥자리를 잡아야 하고 그 이후에는 교수가 되기 전까진 계속 포닥이라고 한다. 심지어 한 학교에서 포닥으로 평생 일할 수도 없다. 규정상 주니어 학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명목하에 그렇다.
아놔.. 일자리를 구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모든 건 내가 논문을 완성하기 전까지는 불필요한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 내 부족한 실력과 앞으로 커리어에 대한 걱정이 눈앞을 흐리게 할 때가 있다. 이미 시작한 일이니 끝까지 해봐야지. 후읍후읍.. 심호흡을 다시 해본다.
한국이나 미국에서 박사과정을 하는 사람에게 독일 박사는 쉬워 보일 수도 있겠다. 각 학교와 학과마다 다른 규정이 있지만 우리 학과 같은 경우에는 박사논문을 쓰고 디펜스를 하면 끝이다. 그렇지만 졸업 후 일자리를 잡는 일은 또 다른 이야기다. 이를 위해서 네트워크도 쌓아야 하고 글 발표도 하고 티칭도 해봐야 하고.. 그 외에도 각자 알아서 필요할 것 같은 능력을 기르는 게 주어진 박사기간 내의 할 일이다. 장학금을 받지 않고 학교에서 일한다면 추가로 일도 해야 한다. 처음 1-2년은 버벅대느라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다. 그때 제일 잘한 일은 논문 챕터 하나의 초안을 끝낸 일인 것 같다. 코로나가 끝나고 나서야 정신을 좀 차렸고 해야 할 일들을 깨달았다. 그러고 나니 이제 졸업이 코앞에 다가왔고 여전히 내가 하겠다고 계획한 업무들이 미완성인 채로 내 앞에 어슬렁거린다.
만약 2019년으로 다시 돌아가 독일에서 공부하는 일을 결정하는 순간이 다시 돌아온다면 난 어떤 선택을 할까? 무모하고 어리석겠지만 다시 같은 선택을 할 수도 있겠다. 지난 4년간 돈 걱정 없이 많은 경험을 쌓았고 공부를 했으니 후회는 아주 조금만 있고 감사함이 더 많다. 독일에 와서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났으니 괜찮지 않을까?
근데 공부는 좀 더 열심히 했을 것 같다. 미래에 먹힐 프로그래밍 언어도 좀 더 많이 배웠을 것 같고 일본어도 좀 더 일찍 시작했을 것 같다. 그리고 주식도 제때 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