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0월의 마지막 날, 교실에서
요즘 아이들이 신이 났습니다. 선생님이 본인들을 좋아한다는 걸 눈치채기 시작했습니다. 좋아하는 감정은 숨기려 해도 어느 순간 비어져 나옵니다. 아이들은 순식간에 흘러나온 선생님의 마음을 정확히 눈치채고 똥강아지들처럼 꼬리를 흔들고 갖은 애교를 부립니다. 학기 초 거리 두기가 무색하게 틈만 나면 선생님 옆자리를 차지하고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어 보입니다. 상대가 귀여워 보이면 지는 거라던데, 저는 이미 아이들과의 싸움에서 지고 들어갑니다.
저와 함께 같은 학교, 같은 학년, 옆 반에서 6년을 함께 보낸 동료 선생님이 올해 저만 보면 입버릇처럼 이야기합니다.
-쟤 올해 너무 달라졌어. 작년이었으면 저런 일 어림도 없었을 텐데.
꼬리를 살랑거리며 다가오는 올해 아이들이 유독 귀여웠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열고 틈이 보이니 아이들은 이때가 싶어 더 깊숙이 들어옵니다.
저와 함께 보낸 시간이 길어질수록 아이들은 선생님이 그어놓은 '선'의 위치를 정확히 파악합니다. 선생님이 받아들일 수 있는 '선'에 한해 농담도 곧잘 하고 본인의 감정도 조금씩 보여줍니다.
그런 제가 요즘 자주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입
선생님이 익숙해진 아이들은 집에서 하는 행동을 학교에서도 하기 시작합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해야 할 때 누군가 볼을 부풀린 채로 입을 쭉 내밀었습니다. 이건 뭐지? 1학년도 집에서나 할 법한 표정을 교실에서 짓기 시작합니다. 덩치 큰 6학년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저 표정은 뭘까요? 황당하기 그지없어 "입 집어넣어"라고 말하면 아이들은 다시 표정을 정리하고 배시시 웃어 보입니다.
시작은 아이 하나였습니다. 그날은 선생님이 한 말에 정말 속상했던지 눈물까지 차올라 그렁그렁한 눈물을 매단 채 입을 쭉 내밀어 보였습니다. 선생님은 "울어?"라고 놀란 가슴을 감추어 물어봅니다. 아이는 삐죽 나온 입을 내민 채 울음을 꾹 참고 고개만 도리도리 흔들어 보입니다. 귀엽지만 처음 본 모습에 선생님도 놀란 마음을 감춘고 아이의 어깨를 도닥이며 달래 봅니다.
-넌 할 수 있잖아. 선생님이 너 믿고 좋아해서 이러는 거 알지?
-네, 알아요. 저도 선생님 좋아해요.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뭔가 석연치 않게 상황을 정리하고 집으로 아이를 보냈습니다. 그 후 아이는 본인의 방법이 통했다고 생각했는지 틈만 나면 입을 삐죽이 내밀기 시작합니다. 그럴 때마다 '입!'이라고 말하면, 아이는 씩 웃으며 원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 귀여워 내버려 두었더니 이젠 다른 아이들도 입 내밀기에 동참합니다.
요즘 서준이는 쉬는 시간이면 학예회 동영상 건으로 허락을 받고 싶어 선생님 앞에서 시위 중입니다. 몇 번을 설득해도 선생님이 넘어오지 않습니다. 아이는 방법을 바꿔 봅니다. 교탁 앞 창틀에서 분무기로 식물에 물을 주며 입을 삐쭉이 내밀어봅니다. 선생님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아이가 볼을 부풀리고 입을 잔뜩 내밀어 보입니다.
"서준아, 입 집어넣어." 서준이는 입을 제자리로 돌려놓습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입을 삐죽 내밀고 선생님을 바라봅니다.
-선생님 엄마가 저한테 '너 그러다 입이 서울까지 닿겠다'라고 말씀하세요.
서준이의 말에 선생님은 웃음을 참지 못하고 빵 터져버립니다. 서준이는 올해 초 대구에서 전학 온 아이입니다. 아마 집에서 뾰로통한 표정을 많이 지었나 봅니다. 서준이 어머니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아이의 표정을 보니 여실히 이해가 갑니다.
- 서준아, 너 그러다 이번엔 입이 대구까지 닿겠다.
서준이는 선생님 말에 헤헤 웃으며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겠다는 굳은 의지로 다시 입을 쭉 내밀어 보입니다. 눈은 반짝이며 웃고 있는데 입은 한없이 나와있습니다. 본인을 지켜봐 달라고 표정으로 맘껏 표현합니다.
요즘 이런 선생님의 변화를 아이들이 눈치채기 시작합니다. 아이들도 틈만 나면 선생님을 놀려대기 시작합니다.
수업시간 교과서를 잘못 펴면 기다려주는 법이 없습니다.
"선생님, 교과서 쪽수요!"
수학시간 숫자 하나, 글자 하나 잘못 쓰면 기다렸다는 듯이 합창을 합니다.
"선생님! 구구단! 3 곱하기 8은 24에요."
혹여나 아이들에게 하얀 거짓말을 치는 순간 귀신같이 알아채고 말을 이어갑니다.
"선생님! 선생님이 학생들한테는 절대 거짓말 안치신다면서요. 그거 아닌 것 같은데요?"
헤어질 때가 얼마 남지 않으니 선생님 밑천이 바닥나버렸습니다. 그동안 거리 두기로 지켜왔던 선생님의 본모습을 아이들이 모두 눈치채 버렸습니다. 요즘 선생님이 만만해졌는지 아이들은 선생님 놀려대기에 열을 올립니다.
이러다가 선생님도 입이 나와버릴 것 같습니다. 저도 볼을 부풀리고 입을 삐죽 내밀어 봐야 할까요? 그러면 아이들이 뭐라 할까요?
선생님, 입 집어넣으세요.
설마 이렇게 말하진 않겠지요? 안 되겠습니다. 다시 정신을 다잡고 아이들을 만나야겠습니다. 마냥 꼬리를 흔들어대는 아이들이 귀여워 다른 의미로 아이들을 다루기가 어렵습니다. 행복한 고민이겠지요. 그래도 내일은 저도 웃음을 참고 좀 더 의젓한 선생님으로 돌아와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