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할 때
좋은 책을 읽으면 삶이 다르게 다가온다. 직접 부딪혀 사는 내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남의 이야기를 통해 나를 이해한다. 책에 나오는 이야기들은 다 내 이야기였다. 수없이 반복해 느꼈던 나의 감정들이다. 아깝다. 먼저 썼으면 좋았을 것을. 세상 살이가 나만 특별한 게 아니었다. 그래, 다 사는 게 똑같지.책에 나를 엮어가며 안심을 한다.
글쓰기는 거꾸로 하는 이해의 과정이었다. 타고난 성장 능력을 발현할 수 있게 고비마다 적당한 에너지 생성 과정이 있는 것 같다. 그 에너지는 누구나 있지만 있다고 다 아는 건 아니다. 이제서야 쓰기의 힘을 빌어 에너지를 충전하는 나다. 읽으며 지난 세월을 이해하고 ,그리며 시간을 여행하고, 쓰면서 다시금 힘을 얻는다. 일상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속닥속닥 끊임없이 조용한 소란이 인다. 나이가 들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도는 기적이 내린다더니 지금 내게도 기적이 오려나 보다.
연필을 꺼냈다. 스케치를 먼저 하는 경우는 내가 많이 차분하다는 증거다. 속이 시끄러울 땐 관찰을 하지 못한다. 천천히 들여다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연필로 그림을 시작하는 건 둘 중 하나다. 차분하지 못한 마음을 억지로 붙들어 바닥에 내려 놓아야 할 때와 이미 고요가 찾아와 마음이 풍요로울 때다. 습관이 되어 버렸다. 이제서야 고흐의 거칠고 대담한 붓 놀림이 깊게 와 닿는다. 그의 붓질은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면서 살 수 없었던 현실에 대한 욕구불만이자 화가 표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열정이라 부르지만.
밤새 태풍을 이겨낸 잎사귀가 기특했다. 그리고 아팠다. 격려해 주고 싶었다. 화분의 지저분한 표면과 잎사귀들을 하나 하나 정성스럽게 닦아준다. 마치 내 마음을 어루만지는 기분이다. 괜찮아, 다 끝났어. 잘 견뎌줘서 고마워. 밤새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잎사귀들의 흔적이 여기저기 보인다. 얼마나 불안하고 무서웠을까. 물을 잔뜩 먹었음에도 군데군데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앙상하게 흔적을 남겼다. 소리 내어 말해준다. 고요가 찾아왔단다. 지금의 평화를 누려봐. 바로 지금이야, 행복할 때!
대충 크기와 자리만 잡는 스케치와는 다르게 이번 그림은 처음부터 잎사귀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온전하게 그려준다. 마치 하나하나에 내 손길이 닿아야 생명력을 얻을 것만 같다. 선을 이용해 그려준 그림을 이번엔 물감을 이용해 그린다. 절제된 색으로 조용하고 평온함을 선물해 주고 싶다. 이미 나는 저 잎사귀들과 하나가 되었다. 안식을 허락해 주어야 나도 그리 될 것만 같아 간절함이 담긴다. 누런 잎들도 초록으로 바꿔줘야지. 녹색은 편안함을 주고 순수한 에너지를 상징한다. 감정의 안식을 허락하는 색이다. 나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를 빼버릴까 했지만 마음을 고쳐 먹는다. 저 가지를 뺀다면 가짜다. 일부가 나쁘다고 빼버리면 그건 내가 아니다. 온전하게 모든 걸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대신 비틀어진 나뭇가지를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울려 티가 안 나게 만들어 준다. 상처도 나쁜 기억도 모두 융화해서 잘 살아가는 모습으로 그려주고 싶다. 최대한 귀기울여 집중했던 잎사귀의 이야기는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귀 기울여 그림을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은 결국 나를 다듬어가는 과정이다. 사람은 연륜에 따라 삶의 흔적이 쌓인다. 내 그림에도 몇 십년의 연륜이 포갬포갬 쌓여가고 있다. 내 손을 거쳐 탄생하는 잎사귀 하나하나가 마치 지금 나의 인간 관계인 것만 같다. 이미 나는 저 잎사귀들처럼 잘 어우러져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도록 쌓은 인연도 아닌데 속내를 주고받는 희한한 관계가 생겼다. 각자의 시절을 거쳐 마음의 지구 열바퀴 쯤은 돌고 돌아 찾아온 이들이 분명하다. 진정한 친구란 이야기를 잘 들어주어야 한다고 했다. 가장 속상하고 힘든 일, 슬프고 아픈 마음,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말들, 심지어 아무 일도 없는 보통의 날들에도 열심히 공감해주고 응원해주는 이들을 나는 뭐라고 불러야할까. 잎사귀 하나하나에 내 마음을 투영한 것처럼 이들과의 관계에서도 나는 수많은 잎사귀들을 본다. 그 사연들이 지금의 이들을 만들었을 것이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가 튀지 않게 그리려고 노력했던 것처럼 이들 역시 튀는 부분 없이 잘 융화된 인생이 보인다. 그들의 조용한 소란은 나의 이야기이자 나의 경험이기도 하다. 우리는 그래서 글로 만나는 사이가 되었을 것이다. 톡이 울린다. 일상을 공유하는 이 조용한 소란이 좋다.
잎사귀 하나하나가 마치 나와 또 누군가의 인생같아 괜히 울컥한 마음으로 간절하게 그렸다. 메마른 가지도 누렇게 변한 잎도 다같은 인생이다. 우리는 한 뿌리에서 나온 각자다. 그러니 사랑하고 어울려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