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얼마나 귀하고 비싼 것을 갖고 있는지가 능력인 것처럼 욕심만 앞서던 때가 있었다.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이것이 좋다 하면 눈이 돌아가고, 저것이 좋다 하면 귀가 솔깃했다. 내가 가진 것들의 가격표가 곧 나의 값어치인 양 믿고 살던 시절이었다. 정작 나를 진짜 가치 있게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인지 그땐 알지 못했다. 사지 못해 불행했고, 갖지 못해 초라했다. 욕심이 앞서 늘 가난했다.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진다 한들 가지고 싶은 마음이 더 크면 결국 가난한 인생이다.
그렇다고 내가 가난하게 자란 것은 아니다. 부모님 덕에 부족함 없이 살았다. 필요한 것은 대부분 가질 수 있었고, 남들이 부러워할 만한 것들이 이미 충분했다. 그런데도 나는 내가 풍족한 줄 몰랐다. 내가 가진 것들은 너무 당연했고, 내가 갖지 못한 것들만 유난히 크게 보였다. 옆집의 커다란 수영장이, 공주처럼 레이스 커튼을 드리운 친구의 침대를 부러워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 노력의 결과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가 누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부모님의 노고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삶은 부모님의 희생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음에도 감사할 줄 모르던 철없는 딸은 노상 비교만 했고 그 비교는 욕심을 낳았다. 그렇게 나는 부잣집 딸이었지만 늘 가난한 사람으로 살았다.
시간이 흐르고 많은 것들이 내 손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아버지와 남편 사업이 망하면서 순식간에 나는 진짜 거지가 되었다. 두 기둥이 무너지고 행복은 폭삭 주저앉았고 집은 경매로 넘어갔다. 모든 재산에는 차례로 압류가 붙었다. 하나씩 하나씩 다 사라졌다. 내 것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내 몸뚱어리 말고는 남지 않았다. 너무도 당연했던 일상도 사라졌고, 가족마저 마음대로 만날 수 없는 시간들이 평생처럼 이어졌다. 무서운 무기력이 나를 지배했다.
나는 모든 것을 잃고 나서야 모든 것을 새로 얻게 되었다. 내가 갖고 있던 것들은 당연하지 않았고 잃은 것들을 되찾기는 다시 태어나는 일만큼이나 힘들다는 것도 알았다. 모두 허상이었다. 언제든 순식간에 사라질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 무너짐의 시간 속에서 나는 하나씩 하나씩 다시 세상을 만났다. 처음처럼. 나조차 나를 처음 만나는 것처럼 낯선 나를 알아가는 시간이었다.
이제는 분명하게 안다. 내가 가진 가장 큰 보물은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인생의 쓰디쓴 맛을 느끼며 사는 게 얼마나 고달픈지 알면 알수록, 나를 알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밖을 향해 있던 욕심은 조금씩 힘을 잃어 갔다. 그제야 싸구려 붓도 흔한 물감도 그림을 그리는 데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종이 위에 이런 나의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욕망이 새싹처럼 돋아났다. 값비싼 물감도 고급 캔버스도 이름난 메이커 붓도 더는 필요 없었다. 훨씬 값진 재료가 이미 내 안에 있었다는 비밀을 깨닫고야 말았으니까. 풍족했을 때의 그림은 형식에 가까웠다. 하지만 붓 하나 살 돈이 없게 되자 그림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몽당연필 하나로도 진실한 그림이 그려졌다. 그 선들 사이로 내가 걸어온 길들이 보였다. 삶의 냄새와 사람들의 표정과 세상을 이해하려 애썼던 흔적들이 묻어났다. 더 애틋하고 더 소중한 그림을 나는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진심이면 충분했다. 외로움과 슬픔, 고단한 세월이 그렇게 내 마음을 조금씩 다듬어 주었다.
나는 이제 욕망을 디자인한다. 젊은 날 끝없이 밖을 향하던 마음을 안으로 돌려놓는다. 더 비싼 것,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 대신 나를 값지게 만들어 가는 중이다. 욕망이 완전히 사라지면 삶의 불씨도 함께 꺼진다는 것도 경험으로 체득했다. 중요한 것은 욕망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그 욕망을 어떻게 아름답게 다듬어갈 것이냐다. 욕망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삶은 점점 더 풍족해지기도 하고 반대로 더 가난해지기도 한다. 사람이 명품을 갖는 것보다 살아 낸 시간들로 천천히 명품이 되어가는 인생을 살고 싶다. 비싼 물건 하나 없이도 조금씩 값이 올라가고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 값은 누군가 매겨 주는 가격표가 아니라 내가 살아 낸 시간들이 매겨 준다.
언젠가 누군가 내 삶의 값을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나는 물건으로 부자가 된 적은 없지만
시간으로 부자가 된 사람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