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농도
그림을 시작할 때 무엇을 그릴지 정하지 않더라도 준비가 그림을 정하는 경우가 있다. 황목만 남았다. 다른 종이가 준비되기 전까지는 그 종이에 맞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섬세한 보테니컬을 그리고 싶지만 황목에 어울리지 않으니 거친 종이결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린다. 인생이라는 화폭도 설계는 이러했지만 다르게 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때로는 불가항력적인 조건에 의해 쌓인 삶의 형체가 단숨에 비틀어지기도 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가 그랬다. 나만은 아니었지만 내 인생에서는 나만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대다수 통제 불능의 번짐이었지만 개인의 실존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은 거대한 구조적 재난은 수채화 종이에 속수무책으로 번지는 물감과 같았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은 이게 아니었는데.
당시 위기는 신문에서 읽는 단순한 경제 지표의 하락이 아니었다. 나와 가족들의 일상을 해체하는 경험이었다. 구조조정, 부도라는 무심한 용어들은 실체적 공포였고, 평생을 바친 아버지의 삶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내일의 불확실성이 시대적 조류라고 이해하기에는 우리 가족 모두의 인생이 너무 심하게 무너졌다.
물 조절에 실패해 화지가 울거나 색이 엉키면 대개 그림을 포기하고 싶어 진다. 그러나 숙련된 화가는 그 번짐을 실패가 아닌 새로운 층위의 시작으로 받아들인다. 물기가 마르기를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은 필수적이다. IMF라는 고난의 계절은 우리에게 강제된 후퇴였으나, 역설적으로 이는 인생이라는 화지가 복원력을 회복하기 위해 거쳐야 했던 응축의 시간이기도 했다.
시간을 견디며 얻은 경험들은 결과적으로 삶의 깊이를 더하는 자산이 되었다. 원색의 화려함만으로는 구현할 수 없는 인생의 입체감은 고통의 농담을 거치며 완성되었다. 당시 나의 좌절은 비대해진 자아를 정제하는 밑색이 되었고, 결핍은 생존을 위한 동력이 되었다. 만약 그때의 내가 없었다면 지금 나는 어땠을까 가끔 상상한다. 삶은 안온했을지언정 견고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고난을 거치며 단단해진 화지 위에 스며든 색채는 이전보다 훨씬 깊은 색을 낸다.
이제 나는 인생의 후반부를 시작할 준비 중이다. 외부의 평가로부터 독립된 고요한 사유의 공간으로 삶을 이동시키는 중이다. 도피가 아니라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한 선택이다. 독서와 그림, 그리고 늦게 만난 글쓰기라는 지적 활동이 상호 유기적으로 잘 버무려져 자리를 잡고 있다.
타인의 사유와 내면의 지평을 확장하는 독서는 혼자만의 시간을 풍요롭게 채워준다. 이 자극은 캔버스 위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그림으로 이어진다. 물의 농도를 조절하며 색을 입히는 행위는 외부의 소음을 차단하고 나에게 집중하게 한다. 그 감각들은 다시 글을 통해 구조화된다. 과거의 상처를 문장으로 객관화함으로써 나는 비로소 내 인생의 관찰자이자 서술자로서의 권위를 확보하게 된다.
젊은 날의 시련이 예고 없이 쏟아진 폭우였다면, 현재의 몰입은 내가 직접 선택하고 통제하는 정갈한 정적이다. 이 충만한 안정감은 지나온 시간을 남은 시간으로 가장 나답게 덮으리라 기대한다. 과거를 재단할 수는 없으나 그 의미는 현재의 역량에 따라 재구성될 수 있다. 견뎌낸 기억은 오늘을 살아가는 근거가 된다.
독서와 그림, 글쓰기라는 이 세 가지 수행은 모두 정직한 시간의 축적을 요구한다. 한 권의 책이 내면화되는 시간, 그림의 물기가 적절히 마르는 시간, 그리고 삶의 파편들이 정연한 문장으로 드러나는 시간은 결코 서두른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생 또한 이와 다르지 않다. 바르게 쌓아 올린 시간의 무게만큼 삶은 깊은 향기를 내뿜으며, 그 숙성의 과정을 거친 자만이 비로소 오늘이라는 시간을 온전히 유희할 수 있다.
도화지 위로 예기치 못한 번짐이 번져가도 이제는 당황하지 않는다. 그 얼룩조차 풍경의 일부로 품어내는 법을 배웠고, 나를 지탱하는 지혜도 제법 단단해졌기 때문이다. 긴 시간 묵묵히 채워온 나만의 농도로 인생이라는 작품을 가장 나답게 그려 나가는 중이다. 비로소 시간이 선물해 준 삶의 기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