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남매 데리고 혈혈단신 밴쿠버 삼만리 정착기
“엄마만 믿고 따라와.” 라며 확신에 찬 얼굴을 들이 밀었지만 첫째는 갸우뚱하며 “가볼까?” 라고 했다. 둘째는 싫다고 했고 (뭐 하자고 하면 좋다고 한 적 없음.) 셋째는 슬피 울면서 구글로 밴쿠버 학교, 집을 검색했고 (현실적인 아이라, 통제불가한 상황을 대비하는 경향이 있음), 막내는 무조건 좋다고 했다. (막내는 언제나 새롭고 큰 세계를 경험하는 것에 신나함.) 물론 남편도 처음에는 아이들 교육때문에 좋다고 했다가, 외로움과 재정과의 싸움이 자신없어 계속 반대했고 1년을 미루었다.
외로운 준비 과정이었다. 온갖 두려움과 염려가 한꺼번에 기습하여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한 날도 있었다. 나의 이런 결정에 대부분 남자들은 부정적이었고, 여자들은 긍정적이었는데 흥미로웠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남들의 반응이나 조언이 아니라 나의 확신이었기 때문에 더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그저 한국에서 계속 입시와 경쟁 속에 아이들 내몰기 자신도 없었고, 나도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재밌는 건 아이들은 오히려 한국에서의 경쟁교육에 잘 적응하여 나름 잘 지내고 있었다는 것. 되려 엄마가 그 성실함의 레이스를 중간에 뚝 끊는 것 같아 미안하기만 했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훗날 아이들에게 선택과 기회의 확장이 되었으면 했다.
하여간 나의 욕구들의 접점이 Trinity Western University의 VIEW(기독교세계관 문학석사)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한국어 과정이기 때문에 아이들 케어를 홀로 감당하면서 공부도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나는 한국어로 공부하고 아이들은 영어로 공부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되었지만 뭐든 배우고 익히자는 ‘주야역학’ 마음이다. 현실은 놀자판이 되겠지만 놀면서 누리는 마음의 풍요로움 또한 값주고 살 수 없으니 괜찮다.
떠나기 몇 주 전부터 내가 뭐라고 융숭한 대접과 사랑으로 환송해 준 성일교회 15목장 식구들, 어여쁜 5여전도회 친구들, 교회 어르신들, 가족들 (엄마, 아빠, 동생, 어머님, 아버님, 고모님, 이모, 외삼촌..)께 정말 감사하다. 남편에게 제일 감사하다. 생각해 보니 남편이 제일 용기를 내었다. 언제나 요란스럽게 기록하고 알리고 떠나는 내가 너무 관종같지만, 이렇게 진솔하게 오픈하고 기도받고 도움주고 받는 것이 옳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에게 또 도전과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신학교 간다고 거룩한 사명 따위 들먹이고 싶지 않다. 내가 쓰임 받든, 안 받든 상관없다. 수 개월 동안 내게 시편 23편 말씀을 깊이 새기셨던 것처럼 언제나 주님은 나의 선한 목자이고, 상급이고, 모든 것이며 당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실 것이고 결국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현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다. 지금도 머리가 너무 아프고, 피곤하고, 어제까지 멘붕이었다. 시험과 도전의 연속이고 결정할 일이 많다. 용감하고 무식하고 무모한 나를 주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기만 바랄 뿐.
잘 다녀오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