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길을 바꾸던 오후!

유월 육일 카페에서...

by 유권식

겨울의 문턱에서 계절은 불현듯 사람의 체온을 낮추듯 다가왔다.

영하 7도의 새벽 공기 속에서, 바람은 아파트 사이를 가르며 매서운 기운을 퍼뜨렸다, 단지 내. 정원 나뭇가지 끝에 남아 있던 가을의 숨결마저 완전히 털어내는 듯했다. 회색빛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그 아래에서 하루는 시작부터 조심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마음 또한 그 바람을 따라 자연스레 움츠러들었다.


오전 산책은 그렇게 미뤄졌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구름 사이로 비집고 나온 햇살이 잠시 바람의 날을 무디게 했다. 베란다 창을 스치던 빛은 잠깐의 온기를 남기고 사라졌고, 그 짧은 위로가 바깥으로 나가볼 용기를 부추겼다.


공원으로 향하려 차에 올랐지만, 시동과 함께 마주한 창밖 풍경은 다시 마음을 붙잡았다. 회색 하늘은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도로 위의 나무들은 잎을 거의 떨군 채 앙상한 몸으로 서 있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가로수의 그림자가 차창 위로 스쳐 지나가며, 오늘은 걷기보다는 머무는 쪽이 어울린다는 신호를 보내는 듯했다.


우리는 말없이 시선을 주고받은 뒤 방향을 틀었다. 도심을 벗어나자 풍경은 조금씩 느슨해졌다. 건물 대신 낮은 지붕들이 나타났고, 길은 논과 밭 사이로 길게 이어졌다. 수확을 마친 논은 겨울을 맞을 준비를 하듯 평평했고, 밭두렁 위 마른 풀들은 바람에 몸을 낮추며 서로 부딪혔다.


양산 상북 대석마을 안쪽으로 들어서자, 시간은 한 박자 늦춰진 듯 흘렀다. 사람의 기척은 드물었고, 차창 너머로는 흙빛과 겨울빛이 겹겹이 겹쳐졌다. 그 길 끝에서, 논과 밭을 조용히 내려다보는 자리에 대형 카페 ‘유월육일’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곳은 오늘의 바람과 잘 어울리는, 잠시 쉬어가기 좋은 풍경 속의 쉼표처럼 서 있었다.


마을로 접어드는 길은 유난히 조용했다. 겨울 논은 수확을 마친 뒤의 숨 고르기처럼 평평했고, 밭두렁 위에는 바람에 눕는 마른 풀들이 낮은 음으로 서로를 스쳤다. 도시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시간이 느려진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카페 간판이 보이기 전까지, 우리는 말수가 줄어든 채 차 안의 온기에 몸을 맡겼다.


입구에 들어서자 아기자기한 돌로 빚은 조각품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버섯 모양 그리고 아기천사상 소품들이 겨울 동화의 한 장면처럼 놓여 있었다. 실내로 들어가니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조명이 공간을 환하게 밝혔고, 그 빛은 차가운 바람에 얼어 있던 마음을 천천히 풀어주었다. 연말 특유의 들뜸이 과하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느껴지는 온도였다.


평일 늦은 오후라 그런지 손님은 거의 없었다. 마치 막 문을 연 공간처럼 한적했고, 발걸음 소리마저 조심스러워졌다. 카운터 너머에서 들려오는 커피 머신의 낮은 소리와 잔을 내려놓는 미세한 마찰음이 오히려 공간의 고요를 또렷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주문한 커피와 베이커리를 받아 들고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2층 창가에 앉자 시야가 한꺼번에 열렸다. 유리창 너머로 펼쳐진 농촌의 풍경은 겨울의 색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윤기가 빠진 논의 갈색과 밭의 옅은 회색, 그 사이를 잇는 좁은 길 위로 바람이 지나가며 작은 먼지를 일으켰다. 그 모든 것이 소리 없이 움직이며, 오래된 풍경화처럼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내와 마주 앉아 커피를 한 모금씩 나누며 일상의 이야기를 꺼냈다. 특별한 주제는 없었다. 며칠 전의 소소한 일, 지나간 계절의 기억, 앞으로 다가올 일정들. 말들은 큰 의미를 갖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그 말들이 이 조용한 풍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흘러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며 문득 생각했다. 여행이란 반드시 먼 곳으로 떠나야만 성립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익숙한 도시를 잠시 벗어나, 이렇게 느린 풍경 앞에 앉아 마음의 속도를 낮추는 일. 그 또한 충분히 여행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우리는 어디에도 서두르지 않았고, 무엇을 더 보아야 한다는 강박도 없었다.


커피가 식어갈 즈음, 햇빛이 서서히 기울었다. 겨울 해는 짧아, 오후의 빛은 금세 저녁의 기척을 데려온다. 창가에 드리운 그림자가 길어지며 테이블 위를 스쳤고, 컵의 가장자리에는 미세한 빛의 선이 생겼다. 그 순간, 시간은 더디게 흐르면서도 분명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말없이 창밖을 보는 눈빛에는 오래 함께한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편안함이 담겨 있었다. 젊은 날의 열정이나 미래에 대한 불안 대신, 지금 이 자리에 온전히 머무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나이 들어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삶의 기술일지도 모른다.


카페 안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덕분에 우리는 주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각자의 생각 속으로 잠시 들어갔다 나올 수 있었다. 책을 읽는 사람처럼, 혹은 오래된 기억을 더듬는 사람처럼. 창밖의 논과 밭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침묵이 오히려 많은 것을 건네주었다.


해가 완전히 기울기 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려오는 계단에서 다시 한 번 트리의 불빛을 바라보며, 연말이라는 시간의 가장자리에 서 있음을 느꼈다. 한 해는 이렇게 조용한 순간들로 마무리되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작게 중얼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찬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그러나 처음 들어올 때 보다는 덜 차갑게 느껴졌다. 몸이 아니라 마음이 데워졌기 때문일 것이다. 대석마을의 길은 여전히 조용했고, 겨울 논은 어둠 속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차에 오르기 전, 잠시 뒤돌아 카페를 바라보았다. ‘유월육일’이라는 간판의 이름처럼, 오늘의 하루도 언젠가는 특정한 날짜로 기억될 것이다. 특별하지 않아 보이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 날로. 우리는 그렇게 또 하나의 조용한 여행을 마음속에 접어 넣고,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겨울의 계절감, 대석마을의 농촌 풍경, 아내와의 대화, 연말의 시간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호흡을 길게 가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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