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를 알면 스페인의 역사가 보인다
그라나다하면 많은 이들이 알함브라(알암브라)궁전을 떠올린다. 거기서 더 나가면 듣는 이의 마음을 간질거리고 애타게 하는 Francisco Tárrega가 작곡의 유명한 기타연주곡, 알함브라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이 있을 것이다. 이렇듯 그라나다를 찾는 이들은 백이면 백 알함브라 궁전을 보려 한다. 하지만 나는 그라나다를 찾는 이들에게 옛 아랍 왕조의 영광 그 너머에서 스페인의 역사를 보고 오라고 전하고 싶다.
로마제국에 이어 서고트족의 영향권 하에 있었던 그라나다가 이슬람의 땅이 된 것은 서기 711년에 시작된 우마이야 왕조에 의한 스페인 정복(Umayyad conquest of Hispania) 이후의 일이다. 그 이후 이베리아 반도의 많은 지역이 아랍 왕조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되었으며 아랍세력이 가장 확장되어 있던 시기에는 아스투리아, 나바라 그리고 아라곤의 북쪽 산간 지방만이 겨우 남아서 독립을 유지할 정도로 이베리아반도에서 아랍세력이 강성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아랍인들의 영역을 알-안달루스(Al- Andalus)라 명명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안달루시아(Andalucia)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
11세기까지 안달루시아는 세비야, 그라나다, 말라가, 코르도바 등 작은 도시국가들로 분열되었고 이들은 외교와 전쟁을 번갈아 가며 생존해 나갔다. 그라나다에서는 이슬람 칼리프 추종세력과 베르베르족(Berber), 자위벤지리족(Zawi ben Ziri)이 내전을 거친 끝에 그라나다 자치국(Taifa of Granada)이 성립되었다. 1090년까지는 알모라비드(Almoravid)왕조가, 1166년까지는 알모하드(Almohad)왕조가 그라나다를 지배하였다.
그렇다면, 그라나다(Granada)의 지명은 어디서 유래하였을까? 그라나다는 현대 스페인어로 석류(granada)를 의미하고, 도시의 휘장에도 석류의 그림이 들어가지만, 이 이름의 연원은 석류와 그다지 관련이 없어 보인다. 아랍어로 그라나다(원래는 Gárnata (or Karnatah))는 "이방인들의 언덕(Hill of Strangers)"을 의미한다. 그라나다의 이름에 언덕(hill)이라는 의미가 붙은 것은 이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세력이 효과적인 방어를 위해 도시의 중심을 저지대에서 현재의 알함브라가 위치해 있는 언덕지대로 옮긴 데에서 기원한다. 이방인들이라 하면 누구를 일컫는 것이었을까? 아마 무어인, 기독교인, 유대인 등이 엉켜살던 그 시대에 각자의 눈에는 서로가 이방인이 아니었을까?
1228년에 알모하드 왕조의 이드리스 왕자가 본국의 왕위를 다스리기 위해 이베리아 반도를 떠나고, 그 자리에 야심에 가득 찬 이븐 알-아마르가 나스리 왕조를 세웠다. 나스리 왕조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오래,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았던 아랍 왕조가 된다.
나스리 왕조가 들어선 지 10년도 되지 않아 위기가 닥쳐온다. 레콩키스타 운동이 강세에 올라 1236년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융성한 아랍 도시국가들의 수도역할을 했던 코르도바까지 기독교 세력에게 넘어가게 된 것이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나스리 왕조는 카스티야 왕국의 페르난도 3세와 협정을 맺어서 1238년에 이들에게서 그라나다 토후국(Emirate of Granada)으로서 제후국과 유사한 지위를 얻었다. 표면적으로는 카스티야 왕국의 제후국이 되었으나, 그라나다는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 간 무역의 중심지로서 큰 영향력을 유지하였다.
이 제후국으로서의 위치가 애매하게 보일 수 있으나, 많은 학자들이 그라나다 토후국이 1238년 이후 약 250년 동안 상당한 자치권과 경제권을 누렸다고 보고 있다. 이슬람의 유명한 여행가 겸 역사가인 이븐 바투타는 1350년에 그라나다를 방문하고, 그라나다가 강력하고 자치적인 하나의 왕국과 같았다고 묘사했다.
나스리 왕조가 그라나다를 다스리던 시기에 그라나다는 다양한 민족과 종교가 혼합된 도시였다. 아랍인과 베르베르족, 기독교인, 유대인들은 분리된 구역에서 살면서도 각 종교와 민족 간의 활발한 교류를 유지하였다.
이베리아 반도에서 모든 이슬람 세력을 몰아내고 기독교 국가로서의 스페인의 기반을 닦은 것은,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부부 중 하나인 카스티야의 이사벨 여왕과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이다. 이들이 가장 마지막으로 '되찾았던(reconquest)' 이슬람의 땅이 바로 이 그라나다이다. 이들이 그라나다를 침공하고 포위하였던 1492년에, 보압딜(Boabdil)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마지막 무슬림 지배자인 에미르 무하마드 7세가 마침내 그라나다 토후국의 지배권을 이사벨과 페르난도에게 이양하였다. 이로서 알-안달루스 지역의 레콩키스타가 완성되었고 이베리아 반도에서 이슬람의 역사가 공식적으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보압딜이 그라나다를 이사벨 여왕과 페르난도 왕에게 내놓으면서 약조 받은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그라나다의 이슬람교인들이 그들의 종교와 관습을 유지하는 것을 박해하지 않고 허용하는 것이었다. 그라나다를 위해 이 조약을 남긴 보압딜은 사랑했던 알함브라 궁전을 뒤돌아보며 깊은 한숨을 쉬었고, 이 '마지막 한숨(the Moor's last sigh: el último suspiro del Moro)'은 그 비극성으로 말미암아 많은 작가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었다.
보압딜이 굳게 믿고 떠났던 1492년의 약속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어그러지기 시작했다. 1499년에 Francisco Jimenez de Cisneros추기경은 그라나다의 첫번째 대주교인 Fernando de Talavera가 비기독교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노력을 소홀히 하였다고 보고 더욱 강력한 개종 계획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 계획은 이슬람교도에게 카톨릭 세례를 강요하는 것과 이에 따라 개종자계급(Converso: convery class)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것이었다. 이것은 1492년 조약에 대한 완벽한 위반 이었으며, 당연히 이슬람교도 사이에서 강력한 반발과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숱한 저항의 몸부림이 있었음에도, 1501년, 카스티야 왕은 그라나다의 모든 무슬림이 개종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그라나다를 떠나야한다는 명령을 내리고 말았다. 이슬람교도들이 쫓겨나기에 앞서 1492년의 조약에 의해 보호 받지 못하고 처형 당하든지, 떠나든지, 개종하고 유대인 조상을 지닌 기독교인(Marranos: 스페인어로 돼지라는 의미)이 되어야 했던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지 않아 이슬람교도 또한 비정한 삼자택일의 선택지를 받았다. 톨레도의 이슬람인과 유대인의 역사와 고스란히 겹쳐지는 부분이 많은 것 같다. 상당수의 지배층은 북아프리카로 이주하였으며, 대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은 개종을 함으로써 그라나다에 남는 것을 택했다.
16세기에 이르러, 그라나다에 남아있던 모스크들은 카톨릭 성당으로 바뀌거나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많은 성당이 추가적으로 지어졌으며, 이베리아 반도 곳곳에서 기독교인들이 이주해옴으로써 도시의 풍경이 크게 바뀌었다. 유대인 지구(게토) 또한 기독교 이주민들의 주거지로 탈바꿈하였다.
그라나다의 함락은 스페인의 역사에 가장 중요한 한 획을 긋는 사건이다. 800년에 이르는 이베리아 반도에서의 이슬람의 지배가 그라나다에서 끝이 났고, 레콩키스타(Christian reconquest)가 완수되었으며, 내부의 영토 분쟁을 해소시킴으로써 내치의 안정을 얻은 스페인 왕국의 해외진출이 그라나다의 함락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사벨 여왕의 후원으로 콜롬부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재발견'함으로써 스페인 제국은 막강한 부와 영토를 얻게 되었다.
그리스도교도가 아랍인과 유대인을 몰아나고 그라나다를 차지하게 되면서 알함브라를 제외한 그라나다의 아랍 건축물들은 대부분 불도저로 밀다시피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이슬람 이후에도 그라나다는 그라나다 본연의 독자적인 문화가 가득찬 거리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 중에서 내가 소개하고 싶은 지역은 알바이신과 사크로몬테이다.
고고학적인 조사에 의하면, 알바이신 지역은 고대로부터 사람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며, 1013년에 Zirid왕조가 이 지역을 둘러싸고 방어벽을 쌓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알바이신이 마주보는 언덕의 알함브라와 평지의 레알레호Realejo, Bib Rambla와 더불어 예로부터 그라나다의 중요한 중심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의 알바이신의 경계는 알카사바Alcazaba의 벽에서 부터 산미구엘 언덕(cerro of San Miguel), Guadix의 문(Puerta de Guadix)부터 다시 Alcazaba에 이른다.
알바이신은 나스리 왕조 시기에 가장 크게 번성했으며, 그 시절의 흔적은 좁은 거리와 San Nicolas라고 불리는 꼭대기의 땅에서부터 누에바 광장Plaza Nueva곁에 흐르는 다로 강river Darro에 이르기까지 복잡하게 굽이치는 골목의 흐름에서 느낄 수 있다.
이슬람 왕조 시대에 알바이신은 공예가와 사업가, 또는 귀족층의 주거지였다. 알바이신과 마주보고 있는 언덕의 알함브라 궁전을 지은 기술자들도 바로 이 알바이신에 모여 살았다. 자신들이 지은 알함브라 궁전을 멀리서 감상하기 위해 조성했을까 싶은 산 미구엘 광장 Plaza de San Miguel 은 알바이신이 위치한 언덕의 중턱에 마치 테라스처럼 자리잡고 있다. 멋진 풍광 때문에, 이곳은 발코니(The Balcony: El Mirador)라는 이름으로도 불린다.
한편, 이슬람 왕조가 떠나고 기독교의 지배를 받게 된 이후부터는 성당이 지어지는 등 이슬람의 흔적은 지워지고 인구가 줄어 점차적으로 쇠락하였다. 아직까지도 남아있는 이슬람 시기의 유적으로는 Alcazaba의 Ziri성벽과 Nasrid벽, 알카사가 타워와 한때 모스크였던 El Salvador교회가 있으며 레콩키스타 이후의 오래된 건물로는 San Cristóbal과 San Miguel Alto, Real Chancillería등이 있다.
알바이신은 그라나다를 구성하는 대표적인 구역 중 하나로, 많은 관광객들이 역사적 관계와 건축 또는 풍광을 경험하기 위해 찾는 대표적인 장소이다. 가뜩이나 언덕 위에 있는 알함브라를 내려다볼 수 있다는 이점이 있는 지역인데, 이는 반대로 오르는 길이 높고 가파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요즘 한국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세그웨이(segway) 투어를 홍보하는 업체들이 많이 보인다.
무덥기로 유명한 그라나다에서도 오르막을 올라야 다다를 수 있는 곳이기에 대부분의 관광객이 미라도르 전망대(El Mirador) 에서 알함브라를 내려다보는 것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으로 알고 내려간다. 하지만 나는 기왕이면 꼭대기의 산미구엘 전망대(La Ermita de San Miguel Alto)까지 가 보기를 권한다.
다만, 다소 무책임하게 들리겠으나 나의 경우 정말 우연으로 만난 알바이신의 2년차 주민인 오헤일리라는 프랑스 아가씨가 일일 가이드를 자처해주어서 헤매지 않고 오르내릴 수 있었지만, 지도만 보고 가기에는 알바이신의 거리가 하도 복잡하여 좀 어려울 수가 있겠다. 미라도르에서 20~30분은 더 걸어올라가야 하고, 아주 무더운 시간을 피하고, 꼭 물 한 병을 챙겨야 할 것이다. 내려오는 길에 알바이신을 둘러싼 이슬람 시대의 성곽과 동굴집cave houses를 볼 수 있는 것이 큰 장점이다.
오헤일리의 설명에 따르면, 참 흥미롭게도 동굴집에는 원래 집시들과 빈민들이 살았던 것이 맞지만, 최근 들어 세계 각국에서 보헤미안의 삶을 꿈꾸는 이들이 멀쩡한 직업을 갖고서(또는 그만 두고서) 동굴집에서 사는 일이 많아졌다고 한다. 자신이 듣는 스페인어 수업을 통해 알게 된 어느 프랑스인도, 이곳에서 프랑스어 수업을 하면서 이 높다란 언덕 어딘가에 동굴집을 하나 빌려서 1년 넘게 살고 있다고 한다. 자동차도 버리고 세간도 간소하게 단순한 삶을 살고 있는데, 본인은 참 만족하고 있는 것이 신기하다나.
사크로몬테지역은 알바이신이 있는 언덕과 더불어 그라나다를 구성하는 일곱 개의 언덕 중 하나인 발파라이소Valparaiso언덕 위에 위치한 주거지역이다. 이슬람시기부터 대표적인 주거지로 자리잡았던 알바이신과는 달리, 이곳은 레콩키스타 이후 그라나다로 이주해온 집시들(Romani)의 오랜 터전이다.
이 지역의 매력은 희게 칠한 절벽에 자리 잡고 있는 집시들의 동굴집과 플라멩코 공연에서 느낄 수 있다. 동굴집의 기원은 명확하지는 않으나 대개 16세기에 이슬람교도와 유대인들이 추방당함과 동시에 그라나다로 유입하기 시작한 집시들이 자신들의 주거양식을 퍼뜨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사크로몬테는 그라나다를 둘러싼 성벽 밖에 위치한 지역인만큼, 정부와 교회의 영향력이 약했고 예로부터 사회 주변부의(marginalized) 사람들이 이곳에 모여살았다.
동굴집의 형태는 그 집의 위치에 큰 영향을 받으며, 따라서 완전히 동일한 집이 존재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대체로 집의 전면은 수직으로 깎아 흰칠을 하여 파사드로 삼고, 아치형의 대문이 그 파사드의 중심에 위치한다. 그 안의 방은 주로 사각형 형태인데, 가능한만큼 방을 몇 개 더 연결시킨 형태이다.
사크로몬테 언덕 꼭대기에는 내가 실수로 방문한 사크로몬테 대사원(Abadia de Sacromonte: Abbey of Sacromente)와 사크로몬테 대학(College of Sacromonte)이 있다. 두 건물은 17세기에 그라나다의 대주교 Pedro de Castro에 의해 지어졌다. 외국 관광객보다는 현지인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다.
사실 팁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것이, 정확히 말하면 나는 이곳을 제대로 방문하는 것을 실패하였다. 누에바 광장에서 흰 버스 중 하나를 타면 사크로몬테까지 다다를 수 있는데, 버스기사에게 '사크로몬테'라고 물어보고 탄 이후 기사가 '사크로몬테'라고 외쳐주기를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기다려보자. 그러다가 왼편에 하얀 절벽 위에 알록달록하게 장식한 집이 보이면 바로 내리는 거다!
나의 경우는 버스기사가 뭐라고 외쳤지만 못알아듣고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두 정거장을 더가서 사크로몬테 대사원(Abadia de Sacromonte: Abbey of Sacromente)까지 가 버렸다. 사크로몬테 대사원에 도착하니 열 명 남짓한 관광객이 있었지만 모두 현지인들이었고, 가이드 투어로만 입장할 수 있다고 되어있었으나 그 가이드 투어도 스페인어로만 진행된다하여 포기를 하고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왔다. 현지인+카톨릭신자가 아니면 가지도 않을 곳에 용케도 가놓고 입구만 보고 돌아온 것이다. 들어가보지도 않은 수도원보다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그곳에서 멍하니 바라보았던 그라나다의 고요한 풍경이 더 마음에 남는다.
사실 사크로몬테는 동굴 플라멩코 공연장이 있는 지역으로, 그렇게 치면 동굴 플라멩코 투어를 통해 나도 발은 디디고 왔다고 할 수 있다. 그 점에서 그나마 그 날의 실패를 위로해 본다.
사크로몬테에서는 일정의 돈을 지불하고 동의만 구한다면 집시들이 살고 있는 동굴집에 들어가 볼 수도 있다고 하며, 모험이 두렵다면 5유로의 입장료가 있는 사크로몬테 동굴 박물관(Museo Cuevas del Sacromonte)를 찾아가 볼 수도 있다. 나는 가보지 않아서 뭐라 평을 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박물관은 그저그렇다는 평이 많다.
* 알함브라 궁전과 헤네랄리페
요것은 기회가 되면 나중에 따로 다루려고 한다
* 알카세리아(Alcaiceria), 칼데레야(caldarella)거리에서의 쇼핑
대성당 근처의 알카세리아 거리나, 알바이신의 오르막이 시작되려는 초입의 칼데레야 거리는 마치 모로코의 바자bazaar에 온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드는 장소이다. 사실 이슬람 왕조가 사라진 지가 언제인데, 그 시절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시장거리라기 보다는 그라나다가 관광지로 유명해지며 활성화된 거리일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는 하지만, 요즘 좀처럼 가기 어려워진 아랍세계의 분위기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 매우 매력적이다.
한가지 중요한 팁이라면, 가게의 수나 물건의 종류는 알카세리아 거리가 더 많지만, 칼데레야 거리의 물건들이 가격이 더 싸다는 것. 예를 들어, 모로코가 원산지라는 원석(?) 귀걸이는 알카세리아 거리에서는 하나에 3유로였지만, 칼데레야 거리의 초입에서는 3개에 5유로였다.
이 거리에서 (틀히 여성분들이) 살 만한 물건은 다음과 같다.
- 싼 맛에 사 보는 3유로, 2유로 짜리 빈티지 귀걸이
- 깨지 않고 잘 들고갈 자신만 있다면, 이슬람 스타일의 모자이크 램프
- 부드럽고 따뜻한 파시미나 스카프 (강추, 최소 1인당 2개는 살 것. 5~6유로)
- 친구들과 가족들, 동료들에게 돌리기 좋은 천으로 만든 동전지갑. (크기에 따라 1.5~3유로)
- 이국적인 인테리어에 관심이 있다면 이슬람 스타일 방석 (2.5~3유로)
- 모로코풍의 도자기
- 다양한 블렌딩 티(양에 비해 가격은 쌌지만, 뭔가 위생적으로 찝찝한 느낌이 들어 사지는 않았다)
* 떼떼리아(Teteria: Moorish tea rooms)
마지막 아랍 왕조가 끝까지 남아 있었던 곳이기 때문일까, 20세기 초부터 관광업에 일찍이 눈을 뜬 지역이라 그럴까, 그라나다에는 모로코식 찻집인 떼떼리아(Teteria)가 유독 많아서 관광객은 물론이고 주민, 거리의 상인, 대학생을 막론하고 무더운 더위를 식히고 갈증을 달래는 장소로 애용되고 있었다. 특히 감명 받은 것은 모로코식 민트티. 한국에서라면 만 원은 넘는 모히토에 서너 잎 담아내고 마는 귀하디 귀한 민트잎이지만, 이 곳에서는 3유로에 주전자 한 가득 우겨넣고 팔팔 끓는 물을 부어 차를 달여 먹는다. 더운 날씨에 뜨거운 차라니, 언뜻 들으면 뜨악할 만한 조합이지만, 그것이 민트티라면 괜찮다. 아주 괜찮다!
그라나다, 파고 팔 수록 더 알고 싶어지는 도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