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론다는 해질 무렵에 가자

by 일랑일랑

세비야에서 론다행 버스에 오른다. 론다까지는 두시간 여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세비야 도심을 벗어나고, 창 밖에는 메마른 들판이 펼쳐진다. 한여름에 여행을 왔지만, 스페인 남부의 한여름은 우리네 한여름과는 자연의 모습이 다르다. 살갗을 태울 듯 내리쬐는 오후의 태양이 식물들이 가까스로 붙들고 있는 초록을 바싹바싹 증발시켜버릴 것 같다. 그래서인가, 세비야에서 론다로 가는 길에 펼쳐진 들판은 내가 미국 서부에서 생활할 때 보았던 사막의 모습과도 비슷하다. 이백년쯤 전에 텍사스에 자리잡았던 안달루시아 사람이 있었으면 고향에 온 것 같은 기시감을 조금 느끼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론다 버스 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론다 시내로 왔다. 거리가 많이 멀지도 않지만 (걸어서 15~20분 정도) 택시비도 6유로 정도로 부담스럽지 않다. 택시 기사도 무거운 짐 들고 고생할 바에는 택시를 잘 탔다고 우리의 선택을 칭찬한다.


우리는 론다에서 에어비앤비에 묵기로 했다. 론다 숙소를 인터넷으로 알아보면서,

다른 지역에 비해 론다의 숙소 시세가 싼 것 같다고 느꼈다. 아무래도 우리가 묵은 다른 도시(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 등)보다 이곳이 더 작은 도시여서가 아닐지. 우리가 묵은 에어비앤비는 거실 겸 부엌과 침실이 분리된 구조였는데, 커피 머신 및 식기구 등 있을 것이 다 있는데도 1박에 6만원 정도 밖에 하지 않았다. 싼 호텔은 3만원대까지 보았다. 우리는 마드리드-세비야 모두 호텔에서 묵었기 때문 론다에서는 우리의 숙박경험에 에어비앤비를 섞어보기로 했는데, 사실상 나에게 있어 첫 에어비앤비 경험이다. 하지만 이번 에어비앤비는 아예 숙박의 용도로만 쓰는 것이라 그런지, 사람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부엌이 딸린 작은 호텔에 온 느낌이었다.




론다에서 우리가 묵은 에어비앤비. 놀랍게도, 에어컨이 없다.




깔끔한 인테리어의 부엌. 소파도 있어서, 여자 3인까지는 같이 쓸 수 있을 것 같다.



우리가 론다에 도착한 시각은 저녁 6시. 지금 천천히 식사를 했다가는 아무리 해가 늦게 지는 스페인이라 해도 론다의 볼거리를 다 보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준비해 온 컵라면과 햇반을 활용해야 할 때가 바로 이런 때.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알뜰하게 그리고 냉정하게 잘 짠 스케쥴이지만, 우리는 론다에 저녁 6시에 도착해서, 그날 저녁(사실 9시까지는 한낮 같은 저녁)에 론다를 다 보고, 누에보 다리 아래에서 야경을 보며 샹그리아 한 잔을 하고, 다음날 새벽 7시 기차를 타고 론다로 떠나 그라나다로 갈 예정이었다.


론다를 세비야에서 당일치기를 할 지, 론다에서 1박을 할 지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에보 다리의 해질녘 풍경이 너무나도 아름답기 때문에 해가 늦게 지는 여름(8월 초 기준 10시에 완전히 지더라)에 론다를 방문한다면 1박을 하면서 돌아가는 고민 없이 천천히 론다를 보는 것을 추천한다.


론다에서 숙박을 할 때, 혹시라도 1박을 할까 2박을 할까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무래도 1박을 추천한다. 사실 론다는 매우 작은 도시라서, 1박만 해도 충분히 많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나의 스케쥴을 마냥 추천할 수는 없는 것이, 오후 6시에 도착해서 그날 저녁만을 론다에 쓰다 보니 못 본 곳이 있어 아쉬움이 남기 때문이다. 특히 무어인의 집Palacio del Rey Moro에 들어가서 협곡 아래까지 내려가는 비밀 통로를 걸어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무어인의 집의 입장시간이 6시까지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론다에서 맛있는 저녁을 먹어보지 못한 것도 아쉽다.





컵라면을 다 먹고 누에보 다리로 나가 보았다. 우리 숙소는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면 바로 파라도르 호텔이 보일 정도로 누에보 다리에서 가깝다. 걸어서 한 2분 정도 걸리려나? 그래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 무서울 걱정 없이 질리도록 누에보 다리를 보고 갈 수 있었다.



왼쪽 상단에 보이는 것이 파라도르 호텔. 절벽 위에 자리잡은 저 식당에서 누에보 다리의 야경을 보기로 마음 먹었다.


누에보 다리를 기준으로 신시가와 구시가가 나뉜다. 신시가라고 해봤자 진짜 현대적인 그런 곳은 아니고, 스페인식이지만 새로 지은 아파트들이 좀 있고 SPA브랜드나 음식점 같은 것이 많은 쇼핑거리가 있고 버스 터미널과 기차역이 있는 정도이다. 대부분의 호텔이 신시가에 있다.


누에보 다리를 건너서 왼쪽으로 돌 전망대가 하나 있는데, 다리의 뒷편이라 하기엔 좀 뭐하지만 계곡으로 둘러싸여 빛이 잘 들지 않는 다소 음침한 방향에서 누에보 다리를 볼 수 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생각 이상으로 높이가 상당하다. 위키피디아를 보니 깊은 곳 기준 120미터의 협곡이라 한다. 누에보 다리의 높이는 약 100미터.



다리건너 왼편 전망대





저멀리에는 누에보 다리가 지어지기 전, 론다 사람들이 사용했다는 작은 다리가 있다. 확실히 누에보 다리보다 계곡의 얕은 부분을 이용해서 지은 것이 눈에 띈다. 다리의 이름은 Puente Viejo(Old Bridge). 론다에 있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작고 오래된 것이다. 1616년에 지어졌고, 현재 자동차는 다니지 않고 사람이 다니는 다리로 쓰이고 있다. 저 다리를 건너 협곡을 좀더 가까이서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 싶었다. 아쉽지만 그럴 만한 여유는 없었다.




많은 관광객이 론다를 찾는 이유, 누에보 다리(Puente Nuevo: New Bridge)에 대한 설명을 한국 위키피디아에서 가져와 보았다. 생각보다 다리가 지어진 지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약 200년 전에 지어졌다. 친구는 1000년 전에 지어진 게 아니냐 했고, 나도 300년 보다는 더 오래된 것으로 생각했었다)과 아치 아래에 위치한 방이 감옥 및 고문 장소로 쓰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왕좌의 게임에서 티리언 래니스터가 갇혀 있었던 아린의 감옥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장소이다.


누에보 다리는 스페인 남부의 론다의 구시가지(La Ciudad)와 신시가지(Mercadillo)를 이어지고 있는 세 개의 다리 중 가장 나중에 만들어진 다리로, 과다레빈 강을 따라 형성된 120m 높이의 협곡을 가로지르고 있다.
다리 건축은 1735년 펠리페V에 의해 처음 제안되었으며, 8개월만에 35m 높이의 아치형 다리로 만들어졌으나 무너져서 50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그로부터 몇 년 뒤인 1751년에 새로이 착공이 이루어져 1793년 다리 완공까지 42년의 기간이 소요되었다. 건축가는 José Martin de Aldehuela이였고, 책임자는 Juan Antonio Díaz Machuca였다. Juan Antonio Díaz Machuca는 다리 건축 시에 필요한 거대한 돌들을 들어올리기 위해서 획기적인 기계들을 고안해냈다. 다리의 높이는 98m이며, 타호 협곡(El Tajo Gorge)으로부터 돌을 가져와 축조하였다.
다리 중앙의 아치 모양 위에 위치한 방은 감옥부터 바까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1936년~39년에 일어난 스페인 내전 기간 중 양 측의 감옥 및 고문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포로 중 몇몇은 창문에서 골짜기 바닥으로 던져져 죽임을 당하기도 했다는 주장이 있다. 현재 이 방은 다리의 역사와 건축에 대한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제는 다리 건너 왼편이 아니라 오른편으로 가 보았다. 흔히 누에보 다리를 대표하는 사진들은 이쪽 방면에서 찍혔다. 현곡이 이어져서 어두운 오른편 대신, 이쪽은 절벽의 끝이라 탁 트인 시야를 자랑한다.


다리 중앙의 아치 바로 위에 있는 작은 방이 바로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감옥이자 고문실로 사용되었던 장소이다.


몇몇 관광객들은 다리를 이쯤 본 후에, 다리를 잘 보았다, 하고 다른 길을 가기도 한다. 그러나 누에보 다리를 제대로 보려면, 반.드.시. 좀더 아래쪽으로 내려가 보아야 한다. 신도시에서 출발해 다리를 건너 오른편으로 돌면, 아래로 내려가 다리를 올려다 볼 수 있는 장소로 가는 길이 있다.




가는 길에 요렇게 예쁜 거리를 통과하고,




기타소리에 홀려 작은 분수대가 있는 공원으로 가면,



썬글래스를 키고 기타를 멋있게 연주하는 기타리스트도 있다.

우리가 맞은편에 자리를 잡자, 동양인임을 알아보고 스튜디오 지블리의 메인테마 중 하나를 연주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가 가장 매료된 곡은 그 유명한 알함브라의 추억(Recuerdos de la Alhambra (Memories of the Alhambra)) 우리가 또 가만히 기다리고 앉아 있자, 딱 알아차리셨는지 알함브라의 추억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이곳의 기타리스트들에게 알함브라의 추억은 어떤 곡일까'하는 딴 생각이 떠오른다. 스페인을 찾는 모든 관광객이 듣고 싶어하는 알함브라의 추억. 혹시 너무 많이 쳐서 지겨워지거나, 다른 좋은 곡도 있는데, 하며 딴 곡을 소개시켜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을까? 우리는 2유로인가 3유로인가를 넣어두고 두 곡 정도를 더 들었다.


요런 길을 따라 내려가면 된다. 작은 고양이가 내려가길레 따라가 보았더니,




요렇게 깜찍한 고양이 쉼터가!




내려가보니 역시 사람들이 꽤 많다. 우리 근처에 서 있는 사람들은 독일인들.






아래에 내려와 보니, 확실히 위에서 내려보던 것과는 다르다. 저 멀리 구릉에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다르고, 햇살도 다르다. 다리의 형태가 더 잘 눈에 들어오고, 구릉이 더 가깝게 느껴진다.








폭포와 아치형 다리의 조화라니!







이 시간, 10시에 해가 지는 스페인의 시간에는 8시쯤, 한국과 비교하자면 해가 7시반쯤이면 지는 여름의 5시 반쯤에 론다에 온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비스듬히 기울어서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태양빛에 화답하듯 누에보 다리가 황금빛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론다에는 누에보 다리 뿐 아니라 아름다운 구시가도 있다. 돌아오는 길에 다리를 한번 더 보기로 하고, 구시가로 걸어들어가 보았다.






깜찍한 기념품 가게도 발견했다. 딱 내가 좋아하는 기념품 가게이다. 중국제일지도 모를 이상한 사진이 프린팅된 접시, 촌스런 엽서 몇 장, 자석 몇 개가 있는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핸드메이드 그릇과 등과 찻잔이 가득한 가게. 나는 여기서 커피잔 세트를 샀는데, 이번 여행 어디에서나 그랬듯이 하나 더 사지 않은 것을 후회한다.






구시가에서 빠져나와 이제는 파라도르쪽으로 걸어가 보았다. 햇빛이 더욱 황금빛으로 변한 것이 눈에 들어온다.




파라도르 옆길로 걸어들어가면 이런 길이 나오고,




요렇게 아름대운 전망대가 나온다.



론다에서의 짧지만 알찬 하루가 지났다.




낮에 찍어두었던 그 식당에서 모히토와 샹그리아를 마셨다. 누에보 다리의 야경이 꽤 유명하지만, 아까 보았던 해질녘의 아름다움에는 비할 바가 못된다. 원래부터 나는 인공적인 야경보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늦은 오후의 햇살을 가장 좋아한다. 유럽의 어느 테라스석이나 다 그렇듯이 모든 자리가 흡연석이어서 론다의 밤공기는 즐길 수 없었지만, 야경을 바라보며 알딸딸하게 취해서는 2분 거리의 숙소로 헤롱헤롱 걸어들어가는 것도 여행의 즐거운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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