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가 넷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 BEST5가 있다.
1위. 대단하시네요
2위. 애국자시네요
3위. 힘드시겠네요
4위. 그렇게 안보이는데
5위. 정말요?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대단해 보이는지는 각자 다르겠지만, 한순간에 나를 보는 시선이 달라지는 건 똑같다. 심지어 같은 네자녀 엄마들끼리도 그렇다. 우리는 알게모르게 자녀가 많은 것이 대단하고, 힘들고, 생각보다 늙은 엄마가 아니고, 저출산 시대에 큰 일을 한다고(라 하기엔 나라 위해 낳은 건 아니라서 빼고싶) 내재된 것 같다.
안면만 트고 정체를 모르다가 모처럼의 대화로 알게 되는 서로의 개인정보.
그 안에서 싹트는 다정한 서열정리가 대화를 정중하게 이끈다.
갑자기 깍듯해지거나 선배취급을 해주는 분위기를 몇 년째 겪다 보니, 이제는 그들이 반응할 때마다 내가 마치 육아 고수로 추앙받는 느낌에 휘감긴다. 왠지 무게감 있는 한마디를 던져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랄까.
하지만 이 부담스러움은 예상 밖의 인물에 의해 사라진다.
자녀를 한 명 두었더라도 그 아이가 나의 첫째보다 나이가 많을 때.
그녀 앞에서 나는 한없이 어린 후배일 뿐이다.
대체 이 나이대의 아이는 어떻게 대해줘야 좋은지와 같은 애매한 질문부터 아이가 진로를 위해 어떤 과거를 지내왔는지 등에 묻지만, 하늘 같은 선배님은 그 댁 큰딸은 동생들이 많은데 어쩜 케어를 하고 계시냐며 동생양육(?)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이렇게 다른 물줄기로 만나 한 하수구로 흘러들어가 사라진다. 그래서 사실 정보를 얻었다기보단 이 사람은 나의 선배라는 프로필이 각인될 뿐이다. 나의 선배도 내가 애넷엄마라는 이미지로만 남아있을까?
어쨌든 육아베테랑이라는 기준은 모호한 것이다.
육아가 서툰 엄마를 통상 '초보엄마'라고 한다면, 애가 넷인 나도 첫째에겐 항상 초보엄마다. 첫째의 나이대를 키워보는게 항상 처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둘째부턴 키우기가 좀 더 수월할까?
생각해보라. 아이가 몇 명이 있든, 그들이 똑같은 인물이던가? 아니다. 이런 애는 난생처음 본다.
말수가 적고 내성적인 첫째딸을 키우다가, 어딜 가나 재기발랄한 둘째딸을 키우자니 모든게 새로웠다. 셋째아들은 그냥 다른 종족이었고, 느지막한 넷째딸은 세 아이의 모습이 다 섞인 멀티키즈였다.
육아 17년 차, 아이를 챙기는 데에 있어 노련함을 보일 수는 있지만 언제나 초보적 틈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융통성과 유연함은 숙련된 자의 영역이라고 오해받기 십상인데, 실상 이 부분은 경험보다 이론에 의해 좌우된 적이 많았다. 제아무리 애넷엄마인 나도 오은영박사의 금쪽같은 조언이 없으면 민들레홀씨처럼 바람 따라 정처 없는 육아를 할 것이니 말이다. (그러고보니 오박사님도 애 하난데요..) 스마트폰만 두들겨도 정보와 사례가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 우리가 육아선배에게 얻고자 하는 것이 과연 새로운 지식인지. 이맘때 애들은 다 그렇다는 말에 유레카를 외치지는 않듯, 먼저 가본 길에 대한 동경 그리고 조금은 시각화된 여정이 내 마음을 놓이게 하는 것이다.
어쨌든 초보엄마나 경력엄마나 힘든 정도의 차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애가 어릴 때는 육체적으로 힘들고 긴장의 연속으로 고행길을 걸었지만, 아이가 크면서는 몸이 덜 힘든 대신 정신수양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다.
또 외동육아는 그 아이에게 매진하느라 힘들고, 다자녀육아는 챙길게 많아서 힘들다. 우리는 어차피 다같이 계속 힘든 초보다. 이 말을 '초보엄마'들에게 꼭 해주고 싶다. 우리가 힘든건 단순히 일이 많고 잠을 못자서가 아니라는 것. 육아가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막연함이 잠식한 상태로 혼자서 버티고 있는 느낌이 나를 무너지게 하는 거라고.
이제 초보엄마라는 프레임을 거두고 조금 먼발치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도 가져봤으면 한다. 차갑게 들리겠지만, 우리가 의지할 건 나 자신뿐이다. 조력자들은 내 움직임에 따라와 주는 것이지 대신 움직여주진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지할 수 있는 단 한사람인 내가 고된 육아에 지쳐있으니, 우리는 미래의 나에게 기대야 한다.
저 끝에 내가 의지할 10년 뒤의 내가 있다.
네 명을 키워보는 건 나도 처음이다. 초보애넷엄마랄까..
이젠 육아가 끝난 줄 알았는데 새롭게 또 시작되고 또 시작되면서 미래를 내다보지 못했다. 안주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갇혀서 나오지 못했다는 게 더 맞는 표현인 것 같다. 아이를 키우는 것 외엔 별다른 걸 하지 않았다면 좀 더 집중하거나, 더 잘 키웠어야 했는데 그런 성과도 없이 힘들기만 오지게 힘들었더랬다. 허나 삶의 주체를 아이들에서 나로 바꾸니 엄두도 못냈던 것들이 모조리 기회였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리고 내 삶을 찾고자 움직이기 시작하니 육아에도 한결 여유가 생겼다. 문제를 문제로만 보지 않고 해결의 과정으로 받아들이며 더 좋은 방법을 찾아 아이와 함께 성장해갈 수 있었다. 십수년간 초보로 아등바등 불안했던 육아가, 나의 삶에서 계속 배워가는 어떤 한 과목으로 귀속된 것이다.
초보라는 딱지를 떼야한다. 스스로를 역경의 인물로 가둬놓지 말고 프로페셔널의 길을 밟아보길 바란다. 생각의 한 끗 차이일 뿐이다. 우리가 가는 길은 언제나 초행이지만 그 불안함을 버틸 수 있게 하는 것 역시 앞으로 나아갈 길임을 잊지 말자.
그런 뜻에서 이미 앞설대로 앞서간 우리의 58년개띠 엄마들이 진정한 무림 육아 고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