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어지게 낮잠을 자고 있는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 엄마가 *@&*인데 &%#!*해서 *$%^하거든? 차키 챙겨서 그 앞으로 빨리 와! 33번 버스 타면 돼!"
앞부분을 제대로 못들었지만 차가 다른 동네에 세워져있고 엄마에겐 차키가 없으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다.
잠이 덜 깬 아득한 정신으로 외투만 걸치고 서둘러 나갔다. 33번 버스가 서는 정거장은 5분 정도 걸어야 하는데. 이 상황이 적잖이 귀찮다. 자다 나왔더니 꼴도 우습고 춥기까지 하다니. 나는 나가자마자 마침 다가와주는 택시에게 손을 흔들었다. 택시 안은 따뜻했고, 행인들은 추레한 나를 발견할 수 없었다. 좋군,하며 등을 기대던 중 퍼뜩 현타가 왔다.
'근데 택시 탄거 엄마가 보면 혼낼건데..음..'
택시기사님께 그냥 멀찌감치서 내려달라 했다. 어차피 버스보단 빨리 도착했을테니 좀 걸어도 되겠지. 근데 여기가 맞나? 하던 찰나 저 멀리서 엄마가 보였다.
아?
그때서야 중대한 사실 하나가 스쳐지나갔다.
차키..
차키!!! 차키를 안가져왔잖아!
아 씨..
차키를 갖다주러 나온 건데, 정작 차키를 두고 나온 것이다. 아니, 애초에 찾지도 않았다.
이런 바보멍청이 같으니라고.
나는 황급히 몸을 숨겼다. 이게 뭐라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큰길로 달려나와 다시 택시를 잡았다. 아저씨 제발 좀 빨리요...집까지는 10분 거리인데, 그 10분이 너무 안가 다리가 달달 떨렸다. 잔돈 됐어요! 도착하자마자 외마디 외침을 남기며 자리를 박찼다.(이 비싼 말을 이 상황에 하게 될 줄이야!) 집에 들어가서 차키를 찾아보는데 마음이 급해서 눈에 뵈는게 없었다. 도대체 어딨는거야. 아까 엄마가 말해준거 같은데! 신발장이랬나? 아닌가? 싱크대인가? 아 여기도 없잖아. 차키를 왜 두고 다녀 증말. 차키 못찾아서 못갔다고 할까? 아까는 나 못봤겠지? 혹시 주머니에 둔거 아냐? 어? 찾았다!
기적적으로 아빠잠바 주머니에서 차키를 찾고선 바람을 가르며 달려나갔다. 당연히 또 택시를 탔고 다리를 달달 떨며 엄마의 언저리로 도착했다. 아까 그 택시보고 기다려달라고 할껄,이라는 쓸모없는 후회를 하며.
"왜이렇게 늦었어. 한참 기다렸네."
"아, 차키 찾느라.. 그리고 그 버스 잘 안와. 엄청 추웠어."
"고생했어. 가자~"
가볍게 차문을 여는 엄마를 보며 안도했다. 문득, 내다버린(?) 왕복 택시비가 아까워졌다. 쥐뿔도 없는 대학생이 던진 "잔돈은 됐어요."도 떠올랐다.
'아까 내가 왜 그랬지? 무슨 생각으로 차키를 찾지도 않은거야? 생각을 하긴 했나?'
잠결이라 그랬을 수도 있다고 넘어갈까 했지만 내 자신이 참 어이없었다.
'근데 그게 그렇게 큰 잘못인가? 왜 숨어?'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이 없었는데 나 혼자 시시비비에 휩싸였다.
'나는 엄마 심부름을 한거야, 만거야? 차키를 안가져왔으니까 안했다고 해야 하나? 어쨌든 나왔으니까 반은 쳐주나?'
굳이 내 잘못을 뒤져봤다.
'사람이 말을 하면 그 의도를 파악했어야지. 말을 듣기만 하면 뭐해, 이해도 못하고 뻘짓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았지만 변호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한치의 고민도 없이 바로 나갔잖아. 심지어 자던 중이었는데! 차키를 안챙긴건 실수였어. 진심으로 도우려 했었다고. 그것도 망설임 없이.'
엄마는 'J에게'를 부르며 그윽하게 핸들을 돌려 골목을 빠져나갔다. 가사를 계속 틀려서 번뇌에 시달리기에 어딘가 방해됐지만, 내분이 일어나는 마음으로 드라이브를 즐길 수는 없었다.
도우려고 한 건 진심이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 문제가 내 문제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도우려 할 때 완전히 그 입장이 되어보았는가,라는 내면의 질문에 답을 하려던 차 집에 도착했다. 그냥 보여주기식 봉사를 해왔던 거구나, 나는 정말 나빠!라고 결론을 내리며 신을 벗었다.
며칠 뒤 친구와 수다를 떨던 중 어처구니 없던 차키배달 이야기를 하게 됐다.
주체성이 없었던 내 모습에 대해 나름 심각한 고뇌였고 용기내어 고백한건데 친구의 답은 또다시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하이고, 지랄도 풍년이다! 그냥 쪽팔려서 숨었던거구만 뭘 또 문제해결이네, 보여주기식이네, 청승이야? 나도 그런적 많은데 나는 뭐 그럼 국회의원인가보다?"
아,
맞네..
바보인게 쪽팔렸네..
듣고보니 그 때도 쪽팔렸던게 맞는거 같은데 사실,
답을 내준 친구에게 더 쪽팔렸다.
때로는 심연의 독백도 이불킥을 만든다는 조언에 알았어, 알았어, 격하게 끄덕이며 애써 대화를 마무리했다.
"사람 생각하는 거 다 똑같애~ 공중화장실에서 변기 막히면 관리실 전화해서 용서해달라 할거야? 열에 아홉은 튄다~ 그냥 적당히 덮고 적당히 넘어가."
...
그렇지만 지금 나는 2000년 그 시절 내게 필요했던 가치관의 정립에 있어 몹시 시의적절한 번민이 발생했다고 여겨본다. 오춘기랄까. 성인이 됐다면서 생일이 안지나 민증검사하는 술집에는 못들어가는 애매한 세대였달까. 애니콜 듀얼폴더폰 따위로 거만해질 수 있던 신입생이었달까. 동기가 차를 끌고 등교한게 세상신기하면서도 티 안내려고 노력했던 초보어른이었달까.
사소했으나 방점이 되어주었고 쪽팔렸으나 깨달음을 얻은 차키와 택시의 콜라보. 그것은 인생 별거 없고 내 마음은 사실 내 마음대로 안된다는, 세상살이에 대한 터득이었다. 지나고 났으니 웃어본다. 어쨌든 나를 성장케 하지 않았는가. 그 순간에 품었던 유치발랄한 고민과 평가를 칭찬하고 싶다. 그렇게 살아오며 열심히 다듬어줘서 참 좋았다고. 귀한 고민이었다고. 짝짝짝, 박수친다고.ㅎ
니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