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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잡스 유진 May 22. 2023

사랑과 우정사이. 그 어디 쯤에 있는 부부의 결혼기념일

 

2011년 5월 21일 부부의 날에 그와 연인관계에서 부부의 연을 맺었다. 결혼 12년 차. 

시간의 겹은 기념일조차 잊을 수 있는 두터운 겹, 아니 벽을 만들어주었다. 그리고 나와 그도 연인의 얇이에서 부부의 두께로 승화되어 사랑 그 이상의 의리의 두터움이 생겼다. 

주말 오후는 늘 그렇듯 눈을 한번 껌뻑일 때마다 한 시간씩 지나가듯 순식간에 시간이 흐른다. 시간은 5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5월의 끝자락은 더위와 함께 길어진 낮도 함께 데려왔다. 겨울이면 어둑해졌을 시간인데 밖은 아직 대낮처럼 환하다.      


‘아뿔사. 오늘 결혼 기념일이구나. 까맣게 잊었다. 아니 기억하고 있지 않았다.’


“오빠~~~~, 오늘 결혼 기념일인데?”

“어...? 그러네....”

“뭐야~~~~, 이제 기념일도 잊어 버린거야. 벌써? 이러기야?”


속마음은 나도 잊어버렸는데 그도 잊어버리는 건 당연한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왠지 이렇게라도 어리광을 부리지 않으면 앞으로 같이 살아갈 날 동안 이런 이벤트는 기억에서 완전히 잊혀져 버릴 것 같았다. 그렇다는 것은 결혼했다는 사실조차 잊고 진정 우정으로 살아갈 것 같은 우려심에서 였다. 


“나가자. 나가서 맥주라도 한 잔 하고 오자.” 오빠는 다급히 옷을 입으며 잠시 외출하자고 한다.  

“귀찮은데...집에 맥주 사 둔 거 있는데 그러나 마시자.” 막상 나가려니 귀.찮.다.

“에이~~그러지 말고 나가자.”

“알았어.” 난 눈치가 빠르다. 언짢아하는 목소리톤이 되기 전에 주섬주섬 청바지에 티셔츠 하나 챙겨입고 따라 나선다. 


“어디 가지?”

늦은 점심을 먹은 탓에 크게 당기는 음식이 없었다. 

“편의점가서 맥주나 한 잔?” 내 말에 남편이 쳐다본다. 

“아..제발 좀.”

“알았어. 술집가면 바싸잖아. 편의점서 간단히 먹으려 했지. 그럼 우리 힙한데 가볼까?”

“아니. 시끄러운데 싫어.”

“술집이 그렇지 뭐. 그럼 어딜 가지?”

30분 정도 동네를 돌아돌아 모든 술집의 품평회를 마친 후 힙함과 소박함의 가운데 쯤의 분위기가 나는 술집으로 골랐다. 


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테라스가 있는 곳은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사람들로 가득하다. 

“내일 출근하면 저녁에 술마시는 거 걱정될 텐데.. 저 사람들은 출근을 안 하나..”

세상 쓸데없는 것이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걱정하는 건데, 나도 모르게 시작하고 있었다. 

“알아서 하겠지.” 역시 냉철한 머리와 가슴을 가진 그는 한마디로 쓸데없음을 날려버린다. 

“뭐 먹을래?”

“음...난 쏘시지?”

“역시 너와 나는 안주 고르는 것부터가 뭔가 안 맞다.”     

‘뭐지. 이게 결혼기념일날을 기념하겠다고 마주보고 있는 자리에서 할 말인가?’ 살짝 짜증이 올라왔지만 

“그럼 뭐 먹고 싶은데, 오빠 먹고 싶은 걸로 해.” 눈은 그를 노려보고 입은 빙그레 웃고 있다. 

“닭발?” 

“오~~역시 좋다좋다. 닭발 좋아.” 마음에도 없는 리액션이 머리를 거치치 않고 입으로 바로 튀어나왔다. ‘닭. 발같은 소리하고 있네.’



“우리가 결혼한지 12년? 13년?째인가?”

“그래. 그렇지. 오래 살았다” 뒤에 말한 오래 살았다는 말은 왜 지겹다로 들리지?

우리 앞에는 시원한 생맥주와 소주가 하나씩 놓여져 있다. 

각자의 술을 들고 12년째 결혼 기념일을 축하한다.      

“고생했다.”

“응, 오빠도 고생했네.”

결혼을 기념하는 자리인데, 고생했다는 인사말이 묘하게 어울렸다. 

12년 전의 가슴 떨림은 사라졌지만 술잔을 들고 있는 손은 전투적인 삶과 육아에 지쳐 가슴대신 힘겹게 떨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그러고 보니 12년 간 우리도 여러 가지로 이뤄가며 변화를 가져왔네.”

“그래. 맞아. 10여년 동안 많이 변했어.”

“아이들도 어느새 이만큼 크고. 앞으로 10년이 기대되네.”

“그러게. 그래서 나는 많은 것이 걱정돼. 앞으로 10년이 정말 걱정된다. 아이들이 아직 어린 것도 그렇고. 우리 노후도 걱정스럽다.”

시작되었다. 

결혼을 기념하는 날.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사치라쳐도 노후걱정까지는 끌고 들어오는 게 아니였는데 말이다. 

어둠이 드리워졌다. 무게가 느껴진다. 가볍게 맥주 한 잔 하자고 했는데 주제는 심각하다. 설렁설렁 두리뭉실한 성격을 싫어하는 남편은 향후 10년간이 계획을 낱낱이 꺼내어 늘어놓는다. 

‘피곤하다.’ 집에서 쉴 것을.


애써 맞장구를 쳐주며 나도 앞으로 10년을 정말 열심히 살겠노라 다짐해주었다. 

아이들을 위해 그리고 남편을 위해 앞만 보며 더 달려보겠노라고. 

그래야 이 이야기는 끝이 난다. 그동안 남편과 살아오며 터득한 것이다. 남편의 진지함은 진지하게 들어주어야 빨리 끝난다는 것을.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이노라를 말해주길 바란 걸까. 


진한 우정인들은 남은 노후를 어떻게 하면 안전하게 보낼까에 대해 한 시간이 넘겨 의논했다. 

결혼 기념일날, 노후 계획을 세우다.      

이야기에 빠져들어서인지 아님 가슴은 답답하지만 시원한 맥주나 마시자는 심정으로 들이켰는지 어느덧 생맥도 두 잔째다. 마지막 남은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시원하게 털어놓고. 

파이팅을 외쳐봤다. 

남은 인생도 멋지게 살아보세~~!!     


20년이 되는 기념일 때는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우린. 

사랑과 우정사이. 그 어디 쯤에 있는 부부의 결혼기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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