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 3권
사유(思惟)의 시간이 많아진다.
글쓰는 시간도 덩달아 늘었다. 차가운 대륙풍이 찾아온 계절이다. 내가 있는 곳. 이 공간을 따뜻하게 덥히는 사유의 땔감들을 일상에서 줍는다. 가장 화력이 좋은 땔감은 단연 책이다. 이미 했던 누군가의 농밀한 사유들이 단단하게 뭉쳐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 검불같이 가벼운 사유의 습작을 세상에 내놓는 중이지만, 계속해 간다면 언젠가 다른 누군가의 아궁이를 활활 태우는 그런 땔감을 마련하게 되리라 믿는다.
우리는 '책을 읽는다'는 것을 '공부를 한다'는 일에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다. 한국인들이 독서를 많이 안한다는 이유 중에는 학창 시절에 지겹게 책을 봐야 했던 흑역사에 원인이 있는지도 모른다. 필자도 주로 시험 준비를 위해서나 그런 차원에서 책을 사고 읽었던게 대부분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인가, 독서가 사람(저자)을 만나는 아주 좋은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세월 지나 철 들었음'을 조금이나마 대견하게 여기는 부분이다.
흔히들 독서량이 어느정도 차야만 글쓰기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얘기다. 독서와 글쓰기는 보완 관계이지, 선후 관계가 아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면 얘기하고 싶다. 글쓰기가 그와 같다. 입을 닫고 외면하고 싶다면 좋은 사람이 아닌 경우다. 우리는 누구나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한다. 배울만한 점이 있는 선한 영향력을 주는 사람을.. 책을 쓸 만한 사람이라면 한 번 만나봄직도 하지 않은가. 그(녀)의 책으로 말이다.
<행복한 나무는 천천히 자란다>, 박철, 뜨인돌(2004)을 단숨에 읽었다. 필자 역시도 가뭇한 세상, 강화도 해안가에 쌓아놓은 수제공(水制工) 같은 사람이 그리웠기 때문일까? 좋은 만남이라는 것은 상대방에게 한 없이 빠져드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통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본질이다. 필자는 올바른 독서도 한번 못해보고 어린 나이에 군에 입대했다. 자칫 수제공처럼 살다가 부서져 사라질 뻔 했을 수도 있었다.
박 목사님을 샘터 공동체를 통해 가까이서 만난 것은 큰 힘이 되고 있다. 필자야 말로 박 목사님처럼 '농촌이 좋다는 낙제 농사꾼'이라 할 만하다. 상추 한장 안 심어 봤으면서도 전답농사 다 지을 생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상선약수(上善若水), '가장 훌륭한 것은 물처럼 되는 것이다.'라는 노자《도덕경》의 경구를 삶으로 살아가리라는 박 목사님을 응원한다. 그가 매일 걷는 그 길 위에 필자도 언젠가 함께 서 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부동(不動)의 필자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은 제주 강정마을 강정천 끝단이다. 한라산부터 구비구비 흘러온 물이 강정 앞바다로 일년 내내 한 순간도 멈춤없이 줄기차게 쏟아져 들어간다. 해작사 검열관으로 있을 때 매년 제주 해군기지를 방문하면 항상 들렀던 곳이다.
현무암 바위에 앉아서 내려다 보자면, 해납백천(海納百川)이란 경구가 절로 떠오른다. 중국 송나라 시절에 고서인《통감절요(通鑑節要)》에 나온다. '바다는 모든 강물을 받아 들인다.'는 말이다. 원문에는 취즉행원(取則行遠) '그리하여 멀리 간다.'는 뜻이 붙는다. 큰 의미를 더한 건 아니다. 세상 천지 물이라는 물들은 전부 바다로 모이는데 그게 가면 또 어디를 가겠는가 싶다. 과욕이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 에크하르트 톨레, 양문(2001), <고요함의 지혜>, 에크하르트 톨레, 김영사(2004)를 며칠에 걸쳐 읽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같은 얘기를 여러가지 다양한 설명으로 반복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저자는 이 순간과 지금 자체에 몰입하고 집중해야 할 것을 끝없이 강조하고 있었다. 오직 지금 뿐인게 맞다.
저자 에크하르트는 1948년 생이다. 필자의 아부지와 갑장이다. 종교 개혁의 나라 독일 사람이다. 기독교 문화에서 생활했지만 불교와 명상 등 다양한 영성 분야도 공부했다. 이십대 후반에 우울증을 앓았다. 현재는 '인류의 영적 교사'로 추앙 받고 있다. 유명한 영성가다.
모든 인간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만 존재하며 살아 간다는 단순한 영적 진리를 책으로 풀었다. 자신의 분명한 경험에서 비롯된 임상과 심리들을 단순한 필체로 전달한다. 본질은 '지금' 뿐이라는 것과 그 '지금'은 '고요함' 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분주하고 불안하며 심지어 고통스럽기까지한 지금 순간도 고요함이 될 수가 있다는 거다. 바로 그가 세계적인 영적 선생인 이유다.
아부지가 많이 생각났다. 학창시절 아부지는 "누구 위해 공부하냐?"며 필자를 빈정거렸다. 아들이 공부할 수 없는 환경을 만들면서도 그런 책임을 아들에게 전부 떠넘기는 모습이었다. 혹여 내가 에크하르트를 만난다면 아마도 그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오직 지금만을 살 수 있다!'는 '스물 아홉 우울한 청년의 유레카'가 책 속에 스며 있었다. 그 뒤에 둘러쳐진 까만 어둠을 보았다. 연민을 느꼈다.
그토록 그가 '이 순간'에만 집중하고 몰입했어야 하는 그 절박함 안에 존재하는 고요함이 과연 온전한 자아일까. 무아지경에서 만나는 영적 존재가 본질이라는 설명에도 공감은 솔직히 어려웠다. '독자가 지금 처한 상황이 저자 의도를 심각하게 왜곡할 수도 있음'을 참작하는 것으로 책을 덮었다. 어려운 책인 듯 싶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그토록 절박하지 않은 게 이유일 것이다.
<영원한 세친구>, 헬메 하이네, 어린이중앙(2001)을 읽으며 그림책 작가가 되어 보는 즐거운 상상을 했다. 동양철학의 지(知), 덕(德), 체(體) 설명을 동화 스토리로 엮었다고 봐야 할까. 가슴 따뜻해지는 모습으로 그려진 사랑마음 아주머니 그림이 특히 인상 깊다.
아주머니가 보여주는 행실이 바로 동양철학에서 말하는 덕승재(德勝才)의 모습이 아닌가. 과학기술 발달로 인간 수명이 120세까지 늘어난다고 해도, 결국 인간이 세상에 남기는 본질적 자취는 사랑이다. 유명 동화작가인 저자, 헬메 하이네가 말하고 싶은 아름다운 인간상의 모습도 결국 사랑을 빼 놓고서는 그릴 수 없었다. 사랑 뿐이다.
독서를 위한 책은 도서관 서가에서 우연히 만나든지, 누군가의 추천에 의해서든지 경로는 중요한 게 아니다.
필자가 생각하는 독서의 본질은 이렇다. 첫째, 손에 들고 읽는다. 둘째, 그 책을 써 내려간 저자를 만난다. 셋째, 책 속에서 만나는 단어와 문장이라는 거울로 자신의 머릿 속과 가슴 속을 찬찬히 비춰볼 수가 있어야 한다.
느리게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 책과 함께 몸소 본을 보여주시는 박철 목사님, 저 멀리 전남 구례에서 에크하르트의 저작을 추천해 주신 서명대 권사님, 관장님 추천도서 <영원한 세 친구> 그림책을 권해주신 김미나 샘터꿈의도서관 관장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그대들로 인하여 필자의 오늘이 책 읽는 기쁨으로 가득 했었음을 진실로 고백한다.@
#서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