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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뭉게구름 Jan 13. 2019

추상미술의 경계는 어디일까?

"구상과 추상 미술의 경계"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내가 추구하는 작업 방향이다. 과연 구상 미술과 추상이 만나는 경계는 어디쯤 일까? 아마 다음 두 그림 사이에 있지 않을까 싶다.

 

도미니크 앵그르 <발팽송의 목욕하는 여인>, 1808
잭슨 폴록, <Number 1>, 1948


위의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은 19세기 전반 보수파 화가의 지도자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1780-1867)의 작품이다. 그는 르네상스부터 이어져 온 고전 미술의 마지막 계승자이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형태의 표연에 있어 탁월한 솜씨와 구도의 엄격한 명료성으로 구상 미술로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완벽한 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앵그르는 학생들에게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고, 즉흥성과 무질서를 경계하라고 가르쳤다. 앵그르 밑에 있는 그림은 추상 표현주의 대표 화가인 잭슨 폴록(1912-1956)의 작품이다. 그의 그림은 앵그르와 정반대로 즉흥적이고 무질서하고 어떠한 형태도 떠올릴 수 없다. 정말 극과 극이라고 할 수 있다.

  

추상과 구상 미술의 장단점은 위의 두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명확하다. 구상은 우리가 항상 보고 있는 자연과 사물을 그대로 2차원 평면 위에 재현하기 때문에 일반인도 작가의 메시지를 쉽게 읽어낼 수 있다. 그래서 중세 시대부터 왕과 교회는 글을 못 읽는 일반 국민을 계몽시키는데 미술을 활용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 나무, 하늘 모든 것을 입체적으로 현실감 있게 그려야 하기 때문에 상당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자연의 형태와 색상에서 벗어날 수 없어, 작가의 창의성이 발휘된기 힘든 단점이 있다.


추상은 구상의 반대라고 보면 된다. 사실 폴록의 그림은 유치원생이 아무렇게나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또 어떤 작품은 선 하나만 그어져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도 작품이냐, 나도 그리겠다."라고 할 정도이다. 추상 미술로 넘어오면서 회화의 기술보다는 작가의 아이디어를 더 가치 있게 평가해 온 결과이다. 하지만 사물의 형태가 무너지고 고유의 색을 잃어갈수록 일반 관람자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점차 어려워지고, 결국에는 비평가와 큐레이터의 도움 없이는 무엇을 그렸는지 조차 알 수 없게 된다.


미술을 처음 배우는 사람은 대게 정물이나 사진을 보면서 있는 그대로 그리는 구상 미술로 시작하게 된다. 1년쯤 스케치하는 법, 입체적으로 보이게 명암을 넣어 채색하는 법 등을 배우고 나면, 아마추어 화가로 계속해서 그림을 그릴지 말지를 결정해야 하는 시점이 온다. 그리고 계속 그린다면 앞으로 어느 방향으로 작업을 해 나가야 할지도 정해야 한다. 어떤 사람은 그동안 배운 기술을 더 갈고닦아 정말 사진 같은 극사실적인 그림으로 갈 수 있고, 반대로 추상의 영역에 도전할 수도 있다. 무엇을 선택하든 오로지 개인의 선택이고 옳고 그름은 없다.


나는 생각과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추상 쪽을 선택했다. 앵그르에서 출발해서 폴록에 도달할 때까지 100년 정도의 시간 동안 모네, 고흐, 세잔, 피카소, 칸단스키 등 수많은 화가들이 구상 미술에서 추상 미술로 한 발 한 발 나아갔다. 어쩌면 100년 간의 기간 동안 활동했던 모든 화가들이 구상과 추상의 경계에 섰던 사람들이다 10년 또는 20년 후에 내가 어느 지점에 서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앵그르와 폴록 사이의 어느 위대한 화가가 섰던 지점일 수 있고, 그들과 다른 나만의 길을 걷고 있을 수도 있다. 계속해서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내 미술의 종착점을 찾아갈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폴록까지는 가지 않겠다는 점이다. 아마추어 화가의 최대 지지자는 가족과 미술적 소양이 부족한 주변 사람들이다. 이들의 성원과 지지는 미술을 계속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그러기에 현실에서 출발하여 추상의 세계로 나가면서 주변 사람들의 이해와 공감을 최대한 이끌어 낼 수 있는 경계에 도달하는 것이 나의 목표이자 종착점이다.  


"추상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항상 구체적인 실재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뭔가 실체가 있는 것에서 출발해야만 나중에 실재의 흔적들을 제거해나갈 수 있다. 그리고 그런다 해도 큰 위험은 없다. 왜냐하면 그 오브제가 표방하는 이념은 아무리 지운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 표시를 남길 테니까. 어쨌든 현실이야말로 화가가 그림을 시작하게 되는, 마음이 흥분되고 감정이 동요되는 출발점이 된다."  -파블로 피카소-



2016년은 손 가는 데로 자유롭게 이것저것 해봤다면 , 2017년부터는 추상의 세계로 방향성 있게 나갔던 것 같다. 이전 글에서 소개했던 유영국의 작품에서 모티브를 얻어 6개월 정도 작업을 해보고, 그다음부터는 추상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실험을 해보고 있다.


<폭포>, 캔버스에 아크릴, 2017.8.12.

"추상화는 곧 단순화이다." 세잔, 피카소 등을 실제 사물을 단순화하면서 추상의 세계로 나갔다. 이 작품을 하면서 어떻게 하면 폭포의 느낌을 낼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다. 결국 굵은 터치로 밑부분의 돌을 그렸을 때 해결됐다. 돌을 사실처럼 그릴 수도 있지만, 단순화한 굵은 터치가 더 생동감을 주는 것 같다.


<봄>, 캔버스에 아크릴, 2017.12.30.

봄의 따스함을 그리고 싶었다. 꽃을 묘사하는 대신 점을 찍어 꽃이 활짝 핀 언덕과 산을 그렸다. 하지만 현실의 파란 하늘로는 따스함을 주기에는 뭔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하늘을 핑크색으로 처리함으로써 원하는 느낌을 얻을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실재와 다른 색깔을 사용함으로써 작가의 의도를 더 잘 표현할 수 있다.


<겨울>, 캔버스에 아크릴, 2018.1.13.

형태와 색 외에 질감으로도 다르게 표현할 수 있다. 산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서로 다른 질감을 가진 색의 덩어리는 산을 연상시키고 가운데 있는 얼어붙은 흰색의 강과 결합되어,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인제쯤에서 볼 수 있는 겨울의 한 풍경을 떠 올리게 된다.


<여명>, 캔버스에 아크릴, 2018.12.29.


 가장 최근에 완성한 그림이다. 유럽의 어느 눈 덮인 산에 희미하게 날이 밝아오면서 산 봉우리가 붉게 물들기 시작한다. 이 그림은 시작할 때부터 중간 과정까지 어떤 형태도 묘사하려 하지 않았다. 단지 번지기와 흘리기로 폴록처럼 우연적인 이미지만 만들었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에 밑의 형태에서 여명의 산을 떠올리고 번지기 기법으로 하늘을 덮었다. 추상의 정의가 현실의 재현을 거부하는 것이라면 이 그림은 추상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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