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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재 May 02. 2024

[서울의지형도] 사라지고 태어나는 공간의 자리

한국예술종합학교신문 380호 기고

Korea Mational University of Arts News

서울의 지형도 Topography of Seoul 정기연재


4 사라지고 태어나는 공간의 자리 


이제 영화가 어디에나 있다. 국내외로 다수의 OTT플랫폼과 유튜브가 운영되며 극장에 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영화를 볼 수 있고, 스크린과 영사기라는 매체적 제한도 사라진지 오래다. 그 이전에도 영화는 극장을 벗어나 다양하게, 다양한 곳에 있어 왔다. 우회한 IP주소로 스트리밍 사이트를 찾아 들어가거나 토렌트에서 국적불문의 영화들을 다운받았고,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던 TV 토요영화, 주말의 명화가 있었다. 아버지를 따라 들어간 만화방 한구석에는 여러 수입영화와 에로영화 비디오테이프가 길게 잘린 직사각형 사진 안으로 제목을 보이면서 눈길을 끌었다. 영화를 극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접하는 것이 익숙했다. 극장은 영화, 극장 그리고 나(관객)라는 삼항 속에서 오랜 시간 동안 어정쩡한 모양새를 가지고 있었다. 


공간은 이렇듯 기술과 매체의 변화를 따라 굴러간다. 어두운 극장 스크린에 쏘여지는 영사기의 빛으로부터 시작한 영화가 전자와 유리의 충돌로 빛을 내는 브라운관 텔레비전에 담기기 시작했다. 그보다 더 작은 컴퓨터와 더욱 작아지는 스마트폰으로 그릇을 옮기는 과정에서, 이제 더는 진공관이 아닌 겹겹의 액정 패널에 빛을 굴절시켜 모니터에 빛을 균일히 뿌리는 것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등 여러 차례의 기술 변화를 거쳤다. 매체는 기술의 발전을 따라서 자신의 유동성을 증가시키기 시작했다. 방송사 편성표를 송출하는 통신매체로 등장했던 텔레비전이 ‘방송 시청’이라는 원 역할에서 점차 벗어나 디지털 스크린으로서의 기 능을 확대하여 미디어 콘텐츠를 실행하는 도구가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볼 수 있겠다. 이제 우리는 집 안에서 텔레비전을 켜고 채널을 돌리지 않는다. 우리의 행동은 TV 모니터에 맞추어 인터페이스가 재구성된 유튜브 화면을 보며 음악을 고르거나 넷플릭스에서 영화를 내려 살펴보는 일들로 옮겨간다. 


영화는 자신이 있을 수 있는 곳들을 다양하게 탐색해왔고, 영화의 공간이 아니었던 곳들이 영화가 있는 공간이 되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새롭게 자리매김하는 공간들처럼 공간을 채우던 것들 역시 때마다 자신의 자리를 바꾼다. 한국의 1970년대는 영화가 새로운 공간을 찾아야 했던 시기다. 한국영화의 꽃이 피었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에 들어서며 한국 영화사는 암흑기를 맞이한다. 박정희 정권의 강력한 검열과 통제로 한국의 영화 환경은 급속도로 변화했다. 외환보유라는 명분으로 실시된 스크린 쿼터제는 영화사가 연간 외화를 한 편 수입할 수 있도록 제한했으며, 검열의 기준에 구색을 맞춘 국책영화를 제작할 시 외화 수입권을 한 편 더 추가적으로 허용했다. 한편 작고 큰 영화사들이 강제로 통폐합되었다. 이는 박정희 정권의 통제 아래 할리우드의 스튜디오 시스템을 모방하여 크고 체계적인 규모의 영화계를 구축하고자 하는 야심을 품은 시도이기도 했지만, 자주적으로 영화를 제작하던 영화사들이 타사와 강제로 통폐합 되는 상황에서 활발한 창작의 기류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런 풍파 속에서 살아남은 몇 편의 수 입영화와 수입권만을 위해 조악하게 제작된 국산영화, 그리고 선전을 목적하는 국책영화들이 당시 70년대 극장의 풍경을 채웠다. 영화는 검열 아래의 극장이 아닌 자신의 성질대로 있을 수 있는 곳, 자신과 관객이 함께 상생할 수 있는 곳을 필요로 했다. 


그렇게 발을 들이게 된 한국 주재 해외문화원, 그중에서도 프랑스문화원은 1970~80년대 한국의 영화 문화에 큰 변곡점을 가져온 공간으로 기록된다. 해외문화원은 당시 정부의 검열 정책의 사각지대로 한국 법률이 적용되지 않아 영화 상영에 제한받지 않는 곳이었다. 외화라고는 가끔 보이는 헐리우드, 홍콩 무협물밖에 없던 시절에 고다르, 알렝 레네와 같이 누군지 모를 불란서 감독이 만든 영화를 틀어준다는 것, 게대가 찐하게 키스하는 남녀의 정사 장면까지 삭제되는 부분 없이 그대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한 이유가 됐다. 1968년 종로구 적산동에 처음 개원한 프랑스문화원은 1971년에 종로구 사간동 70번지에 있는 흰색의 4층짜리 건물로 자리를 옮겼고, 이 두 번째 장소에서 영화는 본격적으로 다리를 펼쳐 자신의 맥을 이어갔다. 사간동의 주한프랑스문화원 지하 1층에는 살 드 르누아르(르 누아르의 방)라 이름 붙은 170석 규모의 작은 영사실이 있었다. 이곳에서 많게는 하루에 6편이 되는 영화를 틀었고, 자막도 없이 틀어지는 영화를 보러 매일 같이 천 명에 가까운 관객의 행렬이 골목을 가득 채웠다고 전해진다. 


80년대에 들어와 비디오가 수입되고 해외여행이 자유로워지기 시작하면서 프랑스문화원이 아니더라도 영화를, 타 문화를 누리는 일이 가능해졌다. 70년대에 프랑스문화원을 채웠던 관객들이 사회로 나가 자리를 옮겨야했다면, 비디오를 보기 시작한 80년대의 관객들은 프랑스문화원 외에도 영화가 자리하는 공간들을 찾을 수 있었다. (영화)를 위한 자리가 곳곳에 생겨났고, 사람들도 다시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프랑스문화원의 살 드 르누아르를 찾는 사람들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영화의 자리가 탈바꿈된 것은 아니었다. 영화를 공부하고 만드는 학생들에게 그들의 영화를 상영하고, 함께 볼 사람들은 항상 필요했기 때문이다. 몇 학생들은 문화원의 영사기사로 재직했던 박건섭의 도움을 받아 자신이 만든 영화를 상영할 수 있는 '토요 단편'이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했고, 이는 다시 한번 영화가 놓인 자리에 활력을 불어넣는 시간이 되어주었다. 당시 프랑스문화원을 오가며 영화를 보고 서클 활동에 참여한 단골 관객들이 바로 한국의 첫 영화광, 1세대 시네필이다. 훗날 문화원 세대라 불리는 이들은 관객 으로서의 영화 향유에 그치지 않고, 개별 모임을 조직하거나 추후 대학교 영화동아리의 주축 멤버가 되고, 작품 활동을 하는 단체로 나아가는 등 한국 영화의 재개를 소원하며 그 기반을 쌓아갔다. (당시 프랑스문화원과 유사하게 영화를 상영하던 독일문화원에 초청되어 1976년 방한한 빔 벤더스 감독을 만났던 관객들이 다시 모여 부산국제영화제를 조직 및 개최했고, 24년이 지난날, 제5회 부산국제영화제에 빔 벤더스 감독을 초청했다. 이 일화로 이들의 열정이 ‘훗날’의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프랑스문화원은 영화가 찾아낸 검열로부터의 숨구멍만이 아니라, 개인과 개인 간의 교류가 일고 집단적 기억이 형성되는 다양한 관계망의 장이었다. 80년대 이후로 프랑스문화원 내외부를 아우르는 한국 영화사가 이어진다. 시네마테크의 설립, 대학 영화 동아리의 시작, 영화 운동과 영화제의 개최 등 영화인의 줄기는 문화원을 떠나 영화에 새로이 자리를 내어주는 공간들로 연결되었다. 


살 드 르누아르는 2001년 프랑스문화원이 봉래동 근처로 자리를 옮기면서 폐관했다. 30년간 한국의 영화문화를 품어주었던 공간은 사라졌지만, 종로구 사간동의 골목길을 기억하는, 영화를 보고 난 뒤 골목으로 들어가 중국집에서 긴장을 풀던 동선을 회고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뚜렷하게 남아있다. 지금도 프랑스문화원은 영화를 선별해 타 극장, 타 공간에서 상영하는 행사를 여는 식으로 자신 안에 영화의 자리를 이으려는 듯 보인다. 장소의 시간은 종종 공간의 시간보다 길게 유지되고는 한다. 


공간과 기술의 변화는 많은 것들을 움직이고 사라지게 한다. 그러나 공간의 변화가 늘 상실을 야기하지는 않는다. 중요한 것은 무엇에 자리를 내어줄 것인지에 대한 문제일 수 있다. 물리적인 공간은 분명 변하고, 또 변해야 하기 때문이다. 서대문구 합동에 위치한 주한 프랑스대사관(이하 프랑스대사관)은 공간의 물리적 변화 속에서 변화와 보존의 문제를 모두 품어내는 과제를 달성한 건축물이다. 한국 근현대건축의 걸작이자 한국 건축계의 거장 김중업 건축가의 초기작으로 1959년 태어난 프랑스대사관은 작년 8년에 걸친 신축 및 리노베이션 공사(2015-2023)를 마무리지었다. 프랑스대사관의 본래의 건축은 역작이라 칭해지지만, 지난 세월 동안 건물에 내·외부적으로 많은 변형이 이루어졌고, 오랜 세월의 흔적으로 건물의 노후도 역시 크게 진행된 상태였다. 이에 따라 프랑스 정부는 부분적인 보완과 수정이 아니라 대대적으로 프랑스대사 관을 재건축할 것을 요구했다. 세 건물로 나누어져 있는 대사관 건물 중 두 채를 통째로 헐어버리려고 했던 프랑스 정부의 발표에 한국의 건축유산을 지켜야 한다는 반발이 일었고, 한국 건축의 속성을 지속하기 위한 설계공모를 열어 건축유산의 보호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 중 윤태훈(SATHY 대표)과 조민석(매스스터디 대표)의 설계도가 공모에 당선되었으며 이들은 ‘보존’의 관점에 입각하여 건축물의 재구성을 실행했다. 지속과 변화를 한 자리에 두는 것은 얼핏 상충된 두 집합의 모음 같아 보인다. 윤태훈과 조민석은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옛 것과 새 것의 관계를 갱신이 아닌 합일과 조정에 관한 것으로 설정했다. 


얼마만큼 자리를 내어줄 수 있는가? 프랑스대사관의 미적인 요소는 그중 많은 것들이 수정되거나 삭제되었다. 사실상 사진과 기억으로 유지되어 온 프랑스대사관의 외관은 보존에 있어 ‘어떻게’ 이전에 ‘무엇을’ 보존해야 하는지를 질문하는 것이 우선시되어야 할 정도로 변한 것이다. 김중업 원안 건축물에서 특징적이었던 형태의 대사 집무동의 지붕이 계단식 지붕으로 바뀌고, 이에 따라 지붕을 지지하던 기둥의 수도 늘어남에 따라 실내 공간과 실외에 형성되었던 구조는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품게 됐다. 작고 크게 수정 된 부분들로 직원 업무동의 모습도 본래의 틀을 잃은 상태였다. 신축 프로젝트는 이렇게 가치 보존의 목적에 더는 부합하지 않는 일부에 프랑스 정부가 요구한 더 넓은 총넓이의 요구를 수용하는 장으로 받아들이고, 다만 김중업이 설계한 세계의 축, 조화, 전통 건축의 해석을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대사관저(이하 김중업관)의 기와를 노출콘크리트의 매끈한 곡선으로 추상화한 지붕의 조형과 필로티 구조가 원안의 형태로 복원 되었다. 대대적으로 변화를 겪은 영사관은 철거되어 김중업관의 동측에 장-루이관으로 신축되었고, 이 과정에서 장-루이관은 북측에 신축된 직원 업무동(이하 몽클라르관)과 유사한 형태의 축과 모듈로 구성함으로써 호흡을 맞추어 중앙의 김중업관을 축 삼아 부드럽게 뒷받침해주고 있다. 


프랑스대사관이 처음 완공된 1961년도 당시의 건물 주변으로 하늘이 펼쳐져 보이던 지형은 더는 찾을 수 없다. 프랑스대사관의 주변은 충정로 일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고층 빌딩의 풍경으로 변했다. 건물과 건물 간의 조화, 지형과 건물의 조화를 중요한 요소로 두었던 김중업의 건축을 보존한다고 했을 때, 전통과 현재를 합일시키는 데 있어서 윤태훈과 조민석이 당면한 과제에는 시간을 따라 변화한 풍경의 합일까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 맥락에서 두 신축관의 유기성은 신축관과 김중업관의 조화, 김중업관과 충정로의 풍경 간 조화 양측을 모두 아우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두 동의 신축관은 어두운 색상과 격자형 구조의 모듈을 사용하는 것으로 몸체를 설계하여 김중업관의 원안이 가진 가치가 현대라는 시간에 묻히지 않을 수 있도록 배경을 처리의 효과를 발휘했고, 기존의 안을 존중하되 새 것이 과거의 시간에 잘 접합되면서 실용 역시 작동할 수 있도록 서로가 대치하지 않는 선에서 조형과 기능을 설계했다. 


리모델링을 거친 프랑스대사관은 자신을 내·외부로 확장하며 새롭게 태어났다. 내부로는 옛 것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외부로는 현재의 시공을 받아들이기 위한 고민이 필요했다. 정문의 위치가 달라지거나 행사를 개최할 수 있있도록 옥상을 조성하는 등의 변화가 생겼고, 이 과정에서 더는 제 기능이 유효하지 않는 일부는 철거되었고, 타 건물의 역할을 이어받아 새로운 기능을 갖추어야 할 필요도 있었다. 프랑스대사관의 개조 프로젝트는 유려한 조정을 통해 변화와 합일이 함께할 수 있는 건축물을 가져다 주었다. 어떻게 자 리하고, 어떻게 자리를 내어줄 것인지.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전망을 과거와 현재, 나아가 미래의 공간 안에서 상상한다. 


1고 2024.04.24

1.5고 2024.05.02 및 각주 추가되었습니다. 


http://news.karts.ac.kr/?p=1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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