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스물 넘은 나에게 세상은 통 언어였다.
세상에 대해서 배워가는 과정은 여전히 낯설고 새롭다. 젊다고 말하기도 어색한 약간 익어버린 어림은 이렇게 늘 애매하다.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은 기분이다. 겉이 겨우 익어 보여 땋더니 꼭 먹을 만큼은 달지 않은 아직은 설익은 멜론? 쯤 같다. 그래서 잘라보기, 그 안을 들여다보기 무섭다. 그렇다고 나의 시간이 막 더디게만 가는 것도 아니다. 가끔은 노을 지는 것이 슬퍼질 때가 있다. 또 이렇게 나의 하루가 가는구나 싶어 서운하기도 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ZkKPMbPw2_4&t=15s&ab_channel=i%27mperfect%3Ajo
지금까지 살아온 (짧은) 인생에서 나름 오랫동안 바뀌지 않은 생각은 옳고 그름은 그 누구도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나 단지 구분되어 있어야 쉽기에 정해놓은 일종의 규칙과 같다고 생각한다. 마치 법이 질서를 잡는 도구이듯. 내가 살아온 세상은 나를 빚어내었는데 또 내가 지나가며 영향을 준 것들이 내가 살아온 세상이 되었다. 그 수많은 클리셰 중에서도 마음에 와닿지 않는 말이 있으며 그렇게도 익숙한 구절들이 새롭게 초점이 맞아 보일 때가 있다. 결국 저마다 사건들에 해석을 붙이고 그것을 몸소 느꼈을 때 '체화'라는 완전한 이해를 자기에게 새긴다.
이해를 하게 하는 모든 행위 및 물체 그것이 보이든 보이지 않던 난 그 모든 것이 언어라 생각한다. 인문학과 공대를 구분 짓는 기준이 수학이라 하는 말이 있는데, 내 기준에선 수학도 언어다 (대학들이 자주 수학을 문과학부로 분리하는 이유가 있지 않을까). 그 언어를 우리에게 배우게 하는 일이 바로 '익숙해지는 ‘ 일 같다 (구몬/싱크빅을 괜히 하는 게 아니다...). 어린 왕자의 그 여우가 나와 같은 마음으로 '길들여지는 것이'라고 말한 게 아닐까.
길들여지는 것 그건 바로 익숙해지는 것이고, 익숙해지는 건 바로 내가 되는 일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이 세상이 언어로 다가오는 것 같다.
나는 길들여지는 게 마음에 썩 내키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활자를 읽을 때 눈에서 반사된 적이 자주 있었다. 이미지로 생각하는 나에게 '글자' 자체가 나의 마음을 건드렸던 적이 자주 있지 않았다. 단지 그 행위에, 그 생김새에 익숙해지려 노력한 것 같다. 그래야 내가 사는 언어의 세상을 단어들로 정갈하게 정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래서 공부도 엉덩이 싸움이라는 게, 그 지식과 기술에 얼마나 익숙해지고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하는 것이라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공부를 '잘'하는 것만을 똑똑한 것의 기준점으로 놓는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시 한번 생각한다.
이해력은 경험과 그전 경험에서 오는 것이라 생각하는데, 그 능숙도가 부족한 사람은 똑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직 서툰 것이지 않을까. 충분한 시간을 들이지 않아 아직 덜 익숙할 수도 있다. 물론 더 적은 시간을 할애했음에도 빨리 많은 것에 적응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과거의 부단함의 결과일 수 있고, 그 사람의 이해구조가 사회의 주류와 들어맞는 경향이 클 뿐이지 않을까. 무엇이 정말 옳고 그른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기에 다른 시선에서는 그들에게도 서툰 포인트가 있지 않을까.
그러니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에 미숙할지언정 그렇다 해서 섣불리 좌절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언어공부를 더 깊게 해보고 싶다. 설익고 서툰 내가 생각하는 것이 바뀌어가는 것을 조금이라도 더 명료히 표현해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언어가 가지고 있는 개인과 사회에 문화적 영향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조금 더 다양한 표면들을 느껴보고 또 나도 표현해 보고 살아보고 싶어 져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