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의 이색적인 연말 풍경
크리스마스 시즌이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크리스마스 꽃'으로 알려져 있는 포인세티아의 원산지는 멕시코이다.
실제로 멕시코에서 불리는 이름도 크리스마스이브를 뜻하는 ‘노체부에나 (Nochebuena)’로,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 크리스마스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식물이다.
포인세티아는 그 빨간 잎사귀가 겨울의 하얀 눈과 또렷하게 대비되어 크리스마스의 설레는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아주 훌륭한 장식품 역할을 해낸다.
멕시코에서도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길거리가 포인세티아로 장식되고 사무실과 집에 이 식물을 들여놓는 곳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다.
멕시코에는 빨간 잎을 돋보이게 해 줄 눈은 내리지 않지만, 원산지인 만큼 멕시코의 강렬한 햇빛에 더 익숙한 잎사귀는 그 어느 나라에서 보는 것보다도 더 싱싱하고 풍성하게 보인다.
멕시코 생활을 시작한 지 3개월 정도 지나 어느 정도 이 나라에 익숙해져 갈 무렵 한 해의 끝을 멕시코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붉은 포인세티아가 한껏 자아내는 연말 분위기 속에서 회사 동료들은 한 해를 마무리할 여행 계획을 짜기에 여념이 없었다. 오랜만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한국으로 가는 동료도 있었고, 화려한 연말 분위기를 즐기기 위해 미국으로 여행을 가겠다는 동료도 있었다.
계약 기간이 5개월밖에 되지 않아 휴가를 받으리라고 기대치도 않았던 나도 운이 좋게 짧게나마 며칠 간의 휴가를 받게 되었다. 뜻밖에 얻게 된 휴가에 어디를 갈지 무엇을 할지 우왕좌왕하고 있던 중, 알고 지내던 멕시코 친구가 휴가 동안 가족들을 보러 부모님 댁에 갈 계획인데 괜찮으면 같이 가도 좋다고 제안해왔다.
낯가림이 있는 나는 처음 보는 사람들과의 만남이 조금은 망설여졌지만, 혼자서 쓸쓸히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낫겠다며 친구를 따라나섰다.
친구네 부모님 댁은 멕시코 시티에서도 한참 떨어진 시골 마을이었다.
친구와 버스 터미널에서 만나 시외버스를 타고 친구의 본가로 향하던 중 몇 번 들르게 된 휴게소에서는 어김없이 크리스마스를 알리는 장식품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그중에서 나의 시선에 들어온 것은 아기 예수 탄생 장면을 꾸며둔 장식품이었다. 이전까지 내가 봐왔던 화려하기만 한 크리스마스 장식품들에 비해 종교적 색채가 짙은 이 소품은 실제로 인구의 90%가 가톨릭 신자로 이루어진 멕시코에서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는 것들 중 하나이다. (멕시코에서는 크리스마스에 산타클로스가 아닌 아기 예수가 선물을 가지고 온다고 믿는다고 한다.)
생경한 크리스마스 풍경을 보면서 도착한 친구네 집 또한 한껏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집안 내부 곳곳의 장식들이 크리스마스에 대한 이 가족의 애정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고, 나도 덩달아 멕시코의 크리스마스 문화를 온전히 즐길 생각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하지만 기대감도 잠시, 12월 24일 밤에 친척들도 모두 한 집에 모여 저녁 식사를 함께 한다는 친구의 말에 생각보다 큰 규모의 가족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갑자기 부담감이 밀려들었다. 기껏해야 친구네 부모님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할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대규모 멕시칸 가족 모임에 입고 갈 옷이 없다는 것이었는데, 집에서 파티를 하는데 다들 드레스에 구두에 한껏 꾸미고 온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나니 친구를 쫓아온 것이 내심 후회가 되었다. (아니 미리 말을 해주든가..)
그러나 난 이미 먼 시골까지 내려와 버렸는데 별 수 있으랴. 다음 날 부랴부랴 쇼핑몰에 달려가서 가지고 온 옷에 어울릴 만한 겨우 구색만 맞출 수 있을 정도의 구두를 한 켤레를 샀고, 친구의 가족들과 함께 먹을 케이크도 하나 손에 들고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친구네 어머니께서는 음식 준비에 여념이 없으셨다.
칠면조 요리를 비롯한 크리스마스 음식들이 뷔페식으로 늘어져 있었고, 멕시코의 크리스마스 전통 음료인 뽄체(ponche; 건과일, 계피, 사탕수수 등을 넣고 끓인 따뜻한 음료)까지 준비되었다.
저녁 식사 시간이 가까워질 때쯤, 친구의 친척들이 하나둘씩 집으로 모여들었고 친구 말대로 여자들은 드레스, 남자들은 셔츠를 잘 차려입고 나타났다. 그들에 비해 평범하기만 한 내 차림새가 창피했지만, 그들에게는 가족 모임에 등장한 한국인에게 관심이 갔을 뿐이지 나의 옷차림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천성이 유쾌하고 친절한 멕시코인답게 그들은 나에게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지며 내가 어색한 자리에서 멋쩍어할 틈을 주지 않았다. 식사자리에서 스페인어로 오갔던 말들을 모두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 장소, 그 분위기는 연말이 주는 따뜻함과 멕시코인 특유의 친절함이 한데 뒤섞여 포근한 기운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멕시코에서는 보통 크리스마스이브에 저녁을 먹은 후 다음 날에 다시 모여 남은 음식을 함께 먹고는 하지만, 휴가가 짧았던 나는 아쉽지만 친구보다 먼저 떠나야 했다.
다시 멕시코 시티로 돌아와 남은 연말을 얼마 남아있지 않던 몇 명의 회사 동료들과 함께 보냈고, 멕시칸과 함께한 나의 크리스마스 경험을 열심히 공유했다. 내가 다녀온 곳이 작은 시골 마을이기는 했는지 동료들은 어디인지 알 지도 못하겠다며 도대체 왜 그런 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냈는지 의아해했지만, 그때 내가 보냈던 작은 시골 마을에서의 크리스마스는 그 어느 때보다도 특별하고 따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