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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마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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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신 Oct 29. 2022

색안경

스스로에 대하여




가장 힘들었던 건 예단을 보류하는 일이었다. 아니, 조금 더 원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상대를 너무 쉽게, 하지만 깊이 가늠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호의가 향하는 최종적 목표는 무엇인지, 살 밑에 숨겨둔 본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난무한 추측 말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내 추측은 대부분 현실과 들어맞았고 그럴 때마다 상대를 향한 나의 태도는 위축되었다. 나는 나의 본능에 가까운 육감을 솔찬히 원망하곤 했다.



예측이 자주 틀리다 보면 가늠하는 일이 두려워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나는 그 정반대 편에 서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허락 없이 예단해버리고 마는 본능을 향한 자의식적 트라우마를 갖게 되었다. 그럴수록 나는 판단을 보류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했고 그 시각, 불행하게도 내 앞에 있는 상대는 내가 그리고 있는 베드 엔딩에 걸맞은 태도를 보이곤 했었다. 그 괴리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았다. 아마 누구도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사람을 머리로 계산하고 있었다. 그 수식 끝 등호 뒤에는 상대를 향한 불신이 차갑게 적혀 있었다. 사람이 사람에게 언제나 진실된 모습을 보일 수 없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 작은 불신의 씨앗은 그 어떤 장점보다 도드라져 보였다. 이내 비합리성은 나의 마음을 손쉽게 지배했다. 머리가 고장 난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은 마음이 고장 났을 수도 있겠다는 불안이 엄습했다.



언제나 그래 왔듯 나를 고장 내는 것도, 나를 건강하게 고쳐내는 것도 내 자신이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내가 나 자신에겐 비합리적인 선택을 해도, 신의 관용을 초월할 정도의 자비를 베풀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했기에 비록 나의 불행이 잘못이 나에게 있다 할지 언정 나를 힐난하는 그릇된 선택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무조건적으로 책임을 회피하려는 건 아니다. 오히려 나로 인해 파생된 문제는 내가 수습해야 한다는 책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를 위해선 내 몸과 마음을 좀 더 가볍게 만들 필요가 있었고 그것이 바로 나를 향한 관용이었다.



언젠간 고쳐질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저 시기의 문제만 남을 뿐이다. 아니, 어쩌면 시기도 문제 삼을 수 없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그 시기를 당기기 위해 실현해야 할 지혜가 있다면 아마도 좌절하지 않는 마음일지 모른다. 그 어떤 노력도 쓸모 없어지는 그런 운명을 무기력하게 수긍하지 않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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