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다루는 그 사람의 방식
또 그 말이다.
있지도 않은 퇴직금 이야기.
프리랜서는 퇴직금이 없다. 살면서 퇴직금에 대해 고민해 본 적이 없다.
나에게 퇴직금이 없어서 아쉽다고, 그 사람은 이미 네 번째 이야기하고 있다.
나의 미래 또는 우리의 미래를 걱정하는 지나가는 말인걸 안다.
하지만 굳이 고민거리를 하나 더 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래서 세 번째 퇴직금 이야기가 나왔을 때, 나는 그 사람에게 말했다.
앞으로 퇴직금 얘기 하지 말아 달라고. 있지도 않은 퇴직금 이야기해서 무엇하냐고.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사소한 대화 속에 일하는 이야기 속에 또 흘러 들어온다.
'퇴직금'
....
그는 흘러가고, 나는 멈췄다.
가슴 한편이 시큰하다. 감정은 반응을 하는데, 이성은 이걸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다.
흘러가는 그를 붙잡았다.
"내가 전에 퇴직금 이야기 하지 말아 달라고 했잖아."
그는 왜 멈췄는지 모른다. 기억이 없다고 말한다.
나는 설명했고, 그는 변명했다.
나는 눈물이 났고, 그는 화를 냈다.
서운함인지 서러움인지 이미 발갛게 달아오른 내 뒤에서 그는 끝내 한마디를 하고 만다.
"너가 예민한 거야."
매번 어찌나 예민한지, 인관관계는 왜 그렇게 서툰지,
나는 퇴직금 없는 사람에서, 문제 있는 사회 부적응자가 되었다.
감정의 씨앗은 항상 사소하다.
그런데 그 사람에게 감정은 사소하지 않다. 하찮다.
상대의 서운한 감정이 그에게는 하찮다. 자존심 강한 그의 무의식은 그것을 하찮게 여기기로 정했다.
그 사람에게 나의 서운함은 불편한 것이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신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것을 받아내려면 그 사람 안에서도 감당해야 할 것들이 생긴다.
자신이 뭔가를 잘못했다는 느낌, 사과해야 할 것 같은 압박, 무언가 설명해야 할 것 같은 상황.
그런데 그 사람은 그것을 다루는 방법을 모른다.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에게 좋은 관계란 마찰 없이 흘러가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서운하다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그 불편함을 빨리 끝내고 싶어진다.
가장 빠른 방법은 나의 감정을 과도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내가 예민한 것이 되면, 그 사람이 다뤄야 할 것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가 그것을 의도한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사람이 상대의 감정에 반응하는 방식일 뿐.
그 사람을 이해한다 한들, 상황은 바뀌지 않는다.
그리고 이해와 감정은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한다.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파편이다.
파편은 청소되지 않고, 마음속을 휘저으며 나를 검열하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걸까?'
'나라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일까..'
살기 위해 안감힘을 써서 불어넣은 자존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는다.
소음 없는 관계를 위해, 정확히는 상처받지 않는 관계를 위해
나의 머리는 계산을 시작한다.
그 사람에게 내가 해도 되는 말은 무엇일까?
내 감정은 어디에서 어디까지 보여줘야 하는 걸까?
서운한 감정은 혼자 처리해야 현명한 것일까?
그리고 문득, 의심이 든다.
그 사람과 나는 진심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불편한 감정을 상대에게 표현한다는 건 관계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에게 이해받고 싶은 욕구이고, 제대로 연결되고 싶은 욕망이다.
서운함을 이야기할 수 있는 관계.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관계.
나는 그 사람과 연결되고 싶었다.
"너가 예민한 거야." 한마디에 연결은 차단되었다.
나의 서운함은 갈 길을 잃었다.
그 어디에도 연결되지 못하고 덩그러니 혼자가 되었다.
그 사람의 작은 공감이 나를 안정되게 해 줄 것만 같다.
"그랬구나" 한마디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다.
감정을 다루는 그 사람과 나의 방식.
끝없는 평행선을 이루며 끝내 닿지 않을 것 같은 불안감.
그만큼의 거리감을 유지하며 우리는 이 사랑을 지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