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막삼 Nov 27. 2020

저 남자의 취향을 훔치고 싶다.

파타고니아를 입고, 이솝 핸드크림을 바르는 그 남자.


첫 회사를 5년 정도 다니다가 그만두고 1년을 넘게 쉬었다. 모아놓은 돈은 떨어졌고, 다음 달 카드값이 걱정돼 일자리를 알아보다 우연찮게 급부상 중인 스타트업에 입사하게 됐다. 평균 연령이 20대 후반~30대 초반일 정도로 젊은 회사였는데 자유분방한 문화 속에서 독특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곳이었다. 


자신만의 가치관은커녕 오랜 백수생활로 자신감마저 잃어버린 나는 회사생활 적응에 적지 않게 고생을 했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지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너무 튀지도 그렇다고 묻히지도 않기 위해 부단히 헤엄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단비 같은 남자 사람 한 명이 나타났다. 깎아놓은 밤톨 같은 외모에 말솜씨도 수려하고, 특히나 유머 코드가 참 괜찮은 사람이었다. 건강한 개그를 한다고 해야 하나? 한 마디로 내 스타일. 편의상 그를 L이라 하겠다. 


L은 여러 모로 괜찮은 사람이었는데 지금도 그를 매력적인 사람이라 생각하는 이유는 자신만의 소신 있는 삶을 살기 때문이었다. 환경 보호는 초등학교 때 표어 그림 그리기 할 때나 생각해보고, 평소에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향이 독특한 L의 핸드크림 브랜드를 물었을 때 'Aesop'을 처음 알게 되었다. L은 그저 향이 좋아서 이솝을 좋아하는 게 아니었고, 브랜드가 환경을 생각하고, 본인들의 가치와 지향점을 명확히 정의 내리는 부분이 좋아서 자주 사용한다고 했다.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물건이나 서비스를 이용할 때 선택 기준에 '환경보호'라는 기준점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는데 L이 주로 쓰고, 입고, 메는 것들은 하나같이 특별하고, 스토리가 있는 것들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소비하는 것들에 대해 브랜드의 히스토리를 꿰고 있다거나 브랜드가 만들어진 배경 같은 것들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그런 것들이 L이라는 사람의 아이덴티티를 완성시켜주는 것 같았다.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마음보다는 동경에 가까운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동경의 다음은 모방이었다. 프라이탁, 파타고니아, 이솝, 그레고리, 포터 등 L이 쓰는 브랜드의 제품을 사기 시작했다. 사면서 아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이런 의미 있고 값어치 있는 것들을 사용하면 내가 L에게 느꼈던 것처럼 남도 나에게 그런 감정을 가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무지랭이같은 생각 말이다. 나도 L처럼 힙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을까 하는 개똥 같은 바람 같은 것 말이다. 


가치로운 것들은 아주 비싼 편이었다. 버려진 방수천과 안전벨트로 만들어진 가방은 몇 십만 원이었고, 직구로 산 파타고니아 겨울 패딩은 미래의 나에게 맡겨둔 채 할부로 긁었다. 가치를 소비한다는 개똥철학 아래 가랭이가 찢어지는지도 모르고 카드 할부를 차곡차곡 쌓았다. 


L이 갔던 카페에 가보기도 했고, 예쁘다고 올렸던 컵을 사서 원래부터 좋아했던 브랜드인 것 마냥 인스타그램에 올린 적도 있었다. 그의 취향을 훔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를 따라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을 만나지는 못했다. 나만 사용하는 제품도 아니겠거니와 오랫동안 L의 안에서 뿌리내린 그의 본질까지는 훔칠 수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동경의 대상을 모방하면서 나는 남의 시선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워지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할부가 끝났다. 나는 더 이상 파타고니아나 프라이탁을 사모으는 사람은 아니다. 대신 파타고니아가 가진 어떤 가치가 L을 그토록 사로잡았는지 알게 되었다. L이 동경하고 좋아하는 브랜드들이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지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L을 동경한다. 그는 여전히 자기 자신의 뚜렷한 취향과 가치관이라는 무기로 멋있게 살아가고 있다. 비싸다고 다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힘들게 번 돈으로 구매한 것들의 가치 정도는 알고 사는 그를 여전히 동경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남의 시선으로부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