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어코 기억이 된다_책
그 일은 S가 내민 두께도 내용도 범상치 않을 것 같은 여섯 권의 책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책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필독서라던가, 입문서라던가 하는 말을 능청스럽게 하곤 했는데 그런 야한 책을 왜 가지고 있는지 잘 알다가도 모르겠으나, 까만 표지에 누런색 내지가 인상적이었던 책을 굳이 빌려주는 바람에 마지못해 읽어 내려간 것이 지난 3월이었다. 그날 이후 아쉽게도 나는 야해지기는커녕 남들도 한다는 일 년에 100권 읽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일평생 책을 좋아했지만, 읽는 것보다 모으는 것을 유지해 왔던 적독의 삶도 청산해보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하루 한 편에 책 읽는 시간을 마련했던 것은 아니었다. 주로 점심시간, 운동시간, 핸드폰을 했던 시간에 책이 들어와 꽈리를 틀었다. 물론 멀쩡히 책을 읽다가도 순식간에 도둑맞은 집중력 때문에 자주 엉덩이를 들썩였고, 핸드폰에 손이 갔고,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눈은 책을 읽고 있었지만 버퍼링에 걸려 이전 페이지로 돌아가야만 맥락을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굳이 너는 왜...?'라며 속마음과 대화를 시도해 보았으나 돌아오는 대답은 항상 '...' 침묵이었다. 책 읽는 내가 좋았지만. 엉뚱하게 속마음과 대화를 시도해 보고 싶을 만큼 그만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는데, 주말이 되면 주중의 루틴을 깡그리 잃어버린 사람처럼 ott의 노예가 되기도 했고, 시간을 모조리 잡아와 온통 잠으로 채우느라 비몽사몽간에 시간을 잃고 허탈해하기도 했다. 사실 조금만 더 노력했다면 100권이 다 뭐람, 거드름 피우며 말할 수 있을 텐데 나는 결국 81권의 책을 읽는 것으로 2023년을 마무리했다.
소설 10권 / 동화책 5권 / 에세이&산문 66권
남은 19권을 어른들을 위한 동화로 가득 채울까? 3월부터 읽었으니 음력으로 계산해 2월까지 읽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그건 어쩐지 반칙 같아서 그만두기로 하고 24년 1월부터 새 마음으로 시작해 보자고 살짝 삐끗했던 마음을 다잡았다.
다만 이전과 변한 것이 있다면, 집 근처 시립 도서관에 다닌 것인데 여러 연령대가 공유하는 공간인만큼 안락함과 생기가 공존하는 곳이라 그 공간 자체에 애정이 생겼고, 빌린 책이 마음에 들면 곧장 주문해 좋았던 부분에 자국이 남지 않는 투명 포스트잇을 붙여두고 필사를 했다. S도 때마다 책 선물을 해줘 어느 여름날에 선물 받은 맹꽁이 신발보다 만족도가 1000%에 가까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은 점이 있다면 책을 읽는 것보다 책을 사들이는 속도가 현저히 빠르기 때문에 소지하고 있는 책들 반은 읽지 못한 것이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렇게 증명되는 것인가... ˃̵ࡇ˂̵)
아직 내게는 표지가 빳빳한 읽지 못한 책들이 있고, 뜯지 않은 포스트잇 플래그가 아홉 개나 있으니 2024년에는 100권 이상의 책을 읽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필사를 꾸준히 할 수 있으면 더 좋겠다. 글감을 그러모아 브런치에 글을 자주 쓰면 더더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