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성의 예술로써 가지는 표현의 자유
막 교복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던 중학교 2학년 봄, 출석부 사진을 보는데 몇몇 여자애들 얼굴에 반짝이별 스티커가 붙어있는 걸 발견했다. 친구에게 보여주자 친구는 ‘남자애들이 가슴 큰 여자애들을 구별하려고 스티커를 붙인 것’이라고 말했다. 처음엔 말이 안 된다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러다 며칠 후 쓰레기통에서 쪽지가 발견되었다. 안에는 반 여자애들의 가슴 큰 순서, 얼굴 예쁜 순서가 실명과 함께 세세하게 매겨져 있었다. 충격을 받은 여자애들이 강하게 담임선생님께 혼내 달라 말씀드렸지만, 남자애들은 선생님 앞에서 “장난이었어요. 재미있잖아요.”라는 변명만 늘어놓을 뿐이었다. 그들에겐 그냥 ‘놀이’였던 것이다. 이는 비단 개인의 경험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줬던 ‘단톡방 성희롱 사건’은 중·고등학생, 대학생뿐 아니라 직장인 남성들 사이에서도 존재한다. 작년 3월에는 남자 연예인이 모인 단체 카카오톡 대화방(이하 단톡방)에서 여성을 몰래 촬영한 불법 영상물을 유포했다는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더 경악스러웠던 건 명백한 성범죄를 저지른 정황을 공유했을 때, 서로 즐거워했다는 단톡방 내용이다.
이들에게도 여성은 놀이의 한 부분일 뿐이었다. 앞선 사건들은 한국 청년 남성의 놀이 문화들이 ‘여성 혐오’를 주요 정서로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이 유명 연예인이라서 사회의 주목을 받았던 것일 뿐이지, 더 큰 남성 범주의 단톡방에서 어떤 정서를 공유하고 있을지는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친다. 지금까지 한국 남성들의 단톡방 문화는 그들만의 연대의 놀이터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다음 타자로 주목받는 한국 청년 남성들의 또 다른 놀이 문화가 있다. 바로 ‘힙합’이다. 이는 여성을 성적으로 대상화하면서 유대감을 가지는 ‘남자끼리’ 문화의 대표다. ‘메갈 X들 다 강간/300만 구찌 가방/니 여친 집 내 안방’, ‘성형빨 명품백에 심취/니년 별명은 내가 지어줄게, 나이 많은 명품걸레 어때?’ 와 같이 여성을 소재로 랩을 하며 자신들의 남성성과 우월감을 과시한다. 시대와 기술이 변함에 따라 수단이 스티커, 종이에서 카카오톡으로, 힙합으로 바뀌었을 뿐이지 한탄스러운 정서는 변함없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힙합이 한국 남성 놀이 문화의 계보를 잇게 된 뿌리는 한국 힙합의 발전 과정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 힙합은 미국 힙합과 정서적으로 성격이 매우 다르다. 사회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미국 지역사회에서 시작된 미국 힙합과 달리, 한국 힙합은 온라인 남성 주류 커뮤니티에서 시작되었다. 이 안에서 미국 힙합이 가진 저항 음악으로써 가치를 빼고 오로지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멋진 미국 래퍼들의 추임새 ‘Bitch’, ‘Gold Digger’ 등의 표현을 가져오면서 여성 혐오 표현을 많이 사용되게 되었다.
즉, 범죄를 저지르는 여성에 대한 공격과 저항의 표현이 한국 남성이 강한 자기를 과시하기 위한 혐오 표현이 된 것이다.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양재영 교수는 “실제로 한국식 정서가 결합한 힙합 문화만 접한 래퍼가 여성 혐오적 표현을 더 많이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말한다. 한국 힙합은 여성 혐오적 정서를 주로 공유하는 대중 음악계의 단톡방인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한국 힙합은 2010년 <쇼미 더 머니>와 같은 힙합 예능 프로그램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으로 대중의 인기를 얻게 되며 더 자극적인 표현을 쏟아내게 된다.
현재까지 한국 힙합은 남성 주류 문화인만큼 여성의 비하는 물론 소외 또한 공공연하게 일어난다. 대다수 힙합 온라인 커뮤니티 남성 유저들은 힙합을 듣는 것조차 남자들의 영역이라 주장한다. 여성 리스너에게는 맨스 플레이를 하며 ‘잘 모르면 닥쳐’라는 말 같지도 않은 논리로 정당한 비판을 무시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리스너가 아닌 여성 래퍼들은 어떤 대우를 받을까?
2015년 Mnet의 <언프리티 랩스타>는 여성 래퍼 8명이 앨범의 트랙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프로그램이다. 매번 경쟁에서 남성 래퍼는 심사를 명목으로 앉아있고, 여성 래퍼는 누가 더 야하고 섹시한지 퍼포먼스를 한다. 이를 보는 남성 래퍼들은 무대를 보며 ‘위문 공연’이라고 비웃기도 했다.
남성 래퍼가 주류인 <쇼미 더 머니>의 무대에선 서로 ‘Respect’, ‘Swag’ 등의 멋있다는 표현을 쓰는 것과 매우 비교되는 모습이다. 여성 래퍼들이 남성 래퍼의 심사에 통과하려면 섹시함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을 누가 더 자극적으로 하는지도 하나의 기준이 된다. ‘가슴 흔들며 말하겠지 shake it/그리고 물어봐야지 오빠 나 해도 돼?’, ‘난 사람 아닌 돼지랑은 못 놀겠네’ 등 스스로 여성을 비하하는 센 발언을 하며 주목을 받는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성 래퍼들에게는 ‘멋있다’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다. ‘언프리티’한 여성이 랩을 한다며 남성 래퍼들의 가사 재료로 소비될 뿐이다. 이렇게 남성우월주의로 가득한 남성 래퍼의 구미에 맞춰야 살아남는 여성 래퍼들, ‘남성들의 문화니, 너희는 잘 모를 것’이라는 이유로 쫓겨나는 여성 리스너들은 한국 힙합이 만드는 유리 천장에 갇혀버리게 된다.
여성 소외를 포함한 더 궁극적인 문제는 한국 힙합이 여성 혐오 표현을 자유롭게 허용해줘도 ‘될 것 같은’, ‘그래야만 하는’ 장르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남성 래퍼에게 그렇다. 이들은 남성 리스너들에게 우상이자 영웅이다. 힙합을 즐기는 남성들은 ‘멋지면 되니까’, ‘(대다수가 남성인) 대중들이 선택해서 뽑은 프로그램 우승 자니까’, ‘남성을 대변하는 영웅이니까’, ‘예술이기 때문에’ 여성 혐오 표현을 사용하는 것에 제약을 두면 안 된다는 논리를 펼친다. 즉, 사회에서 몰라주는 자신의 마음을 대신 예술로 표현해주는 멋진 영웅이기 때문에 여성 혐오 표현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5년 <쇼미 더 머니 4> 출연 이후 강한 팬층을 얻은 래퍼 블랙넛은 ‘벌려봐 너의 보X /아 벌리지 마, 썅년아’, ‘설현, 유정, 수지 God damm they SUSHI/시비 걸면 계속 형들과 널 CHOP CHOP SUCHI SUCHI’ 등의 공격적이고 직설적인 여성 혐오 가사로 이슈가 되었다.
페미니스트들의 강한 비판에 대해 반박하는 핵심 논리 중 하나는 ‘진정성의 예술로써 가지는 표현의 자유’였다. ‘다른 래퍼들은 쓰고 싶어도 못 쓰는 솔직한 가사가 너무 매력 있다.’, ‘안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보여준다.’는 것이다. 우리의 심정과 처지를 대변하기 때문이라는 것인데,
결국 자신들이 루저라는 사실을 솔직하게 표현해줄 우리의 영웅은 아무 말이나 해도 된다는 창피한 논리일 뿐이다. 이 모순으로 가득 찬 담론은 지금까지 수많은 남성 팬과 래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멋있기 때문에, 진정성의 예술이기 때문에 여성 혐오를 허용해줘도 될 것 같고, 그래야만 하는 한국 힙합 문화는 여성을 비하함으로써 과한 남성성을 과시하고 어긋난 유대감을 강화하는 구조를 이어가게 만든다. 무엇보다 ‘그래도 되니까’의 분위기는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알더라도 말하지 못하게 만든다.
한국 힙합은 실제 여성 래퍼, 리스너가 소외되고 있다는 사실과 여성 혐오를 주요 정서로 공유하며 동성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원리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청년 남성들의 놀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힙합으로 대표되는 남성들의 놀이 문화에서 여성 혐오는 순환을 거듭하고, 동시에 강화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검열되지 않은 힙합 노래들이 SNS, 유튜브 등으로 공유되며 혐오 정서는 한층 더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있다.
문제는 최근 한국 힙합 소비 연령이 점점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힙합 예능 <고등래퍼> 같은 프로그램이 생기고, 새로운 시즌의 <쇼미더머니>에도 중·고등학생 참가자가 증가하고 있다. 학생들이 힙합을 하기 위해 마이크를 드는 건 문제가 아니다. 다만 가치관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10대 청소년이 한국 힙합 문화 속 악습을 답습하게 되는 것이 문제다. 음악 평론가 한동윤은 한국 힙합이 ‘이 악습을 버리지 못하면 힙합은 불량배들의 ‘구강 변소’ 일뿐이다.’고 말했다. 이제라도 한국 힙합에서 이 논쟁에 대해 제대로 논의할 필요가 있다.
힙합이 가부장제적 성차별에 대한 사회의 책임을 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뿌리 깊은 여성 혐오의 정서 구조를 드러낸 대중문화이며, 그들이 만들어내는 언어는 현실의 문제를 보지 못하게 만드는 여성 혐오적 가사를 양산하고 있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그들이 서로를 ‘respect’ 하듯 우리의 목소리와 움직임을 존중해야 할 것이다. 단지 ‘힙합은 원래 그래’라는 억지스러운 담론은 이제 되려 시대의 멸시와 소외를 불러올 것이다. 한국 힙합은 이에 대한 답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한국 남성 청년들의 추한 구강 변소로 남을 것인지, 한 시대를 풍미한 음악 장르로 남을 것인지는 이제 그들의 선택에 달렸다.
(2020년 1월에 씀)
<참고문헌>
김수아, 「힙합은 여성혐오적 장르인가요?」, (『한국대중음악학회』통권16호 2015)
김수아 · 홍종윤, 「한국 힙합에 나타난 루저 남성성 담론과 여성 혐오 : 블랙넛 사례를 중심으로」, (『한국대중음악학회』통권18호 2016)
김영대, 「[대중음악사10] 한국 힙합의 발생과 정립과정 – ‘문나이트’에서 ‘마스터플랜’까지」, (『문학동네』제26권 제2호(통권99호) 2019)
최태섭,『한국, 남자』(은행나무 :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