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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중 Jul 15. 2020

소설 '갱부'를 읽고

나쓰메 소세키, 1908년 6월.

 나쓰메 소세키의 장편 소설 중 하나인 '갱부'를 읽었다. 돌이켜보면,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갱부'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지 몰랐던 듯하다. 게다가 작품 중간까지 갱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에, 읽다가 제목이 갱부라는 사실조차 잠시 잊었다.



가도 가도 소나무 뿐이라 도무지 요령부득이다. 내가 아무리 걷는다고 해도 소나무 쪽에서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처음부터 아예 우두커니 서서 소나무하고 눈싸움이나 하고 있는게 나을 뻔했다. - p.15


 첫 문단부터 일본 느낌이 물씬 났는데,  '소나무 쪽에서 어떻게 해주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라는 표현이 특히 그랬다. 세상은 넓고 거대하지만 나는 좁고 나약하기에, 거대한 세상 앞에서 개인의 선택권은 없다는 청초한 느낌이라 하면 될까.


 책 중간에야 비로소 갱부가 뭔지 알 수 있었다. 광에서 일하는 사람이 광부이듯이, 갱에서 일하는 사람이 갱부였다. 정말 당연한 그 사실을 왜 읽으면서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상당히 의아했다. 하지만 '광부'와 '갱부'가 주는 느낌은 분명히 다르다. 광산에서도 가장 아랫부분이자 끝부분인 갱에서 일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갱부였다. 광부들 중에서도 막장에서 일한다고 하면 다르게 느껴지듯이 말이다.




갱부가 되고 싶었던 젊은이


"임자, 몇 살이나 되었나?"

"열아홉입니다."
실제로 그때는 틀림없이 열아홉 살이었다. - p.31


 열아홉 살의 주인공은 사소한 사랑 문제에 얽혀 집을 떠나는데, 스스로 왜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면서도 이유를 찾기보다는 그냥 죽기로 결심한다. 그렇게 집을 벗어나 걷다가, 우연히 갱부를 모집하는 사람을 만나 따라간다. 이왕 죽기로 했으니 흘러가는 대로 살아가는 모습이다.


 20세기 초 일본은 특히나 젊은 층에서 자살이나 죽음이 하나의 목표나 구원처럼 받아들여졌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일본뿐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절대적 가치가 무너지며 '인간은 왜 사는가?'에 대한 명확한 대답이 사라진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죽음을 결정한 주인공은 당시 시대상을 잘 반영하는 인물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19살의 젊은이가 자신만의 주관을 갖고 판단과 선택을 한다는 설정이 더 어색했을 수도 있다. 오히려 그 나이에는 주위 사람들의 말에 흔들리며 사는 게 더욱 자연스럽다. 누구나 흔들리는 시기가 있고, 그 시기에는 타인의 말에 따라 자신을 바꿀 수 있다는 게, 단점이면서도 장점으로 작용하는 것처럼.




돌아가는 게 좋을 거요


어떻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게. 아마 처음부터 갱부가 될 수 있고 또 돈을 잔뜩 벌 수 있다는 식의 달콤한 얘기라도 했을 거요. 하지만 실제로 해보면 아무리 해봐야 이야기 한 것의 10분의 1도 안 되니 마음에 안 찰거요. 무엇보다 한마디로 갱부라고 말은 하지만, 평범한 사람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오. 특히나 당신같이 학교 교육이라도 받은 사람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거요. - p.151


 그렇게 주인공은 갱부들의 숙소에 도착하여 갱부들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주인공이 노동을 모르고 살아온 도련님임을 한눈에 알아차리고 어서 돌아가라고 말한다. 정말 한결같이, 보는 사람마다 돌아가라고 하는 터라 주인공은 되려 오기가 생겨 남아있겠다고 한다.


 문득 왜 갱부들이 그렇게 주인공을 돌려보내려 했을까 의구심이 들었다. 갱부는 어차피 더 이상 나빠질 게 없는 마지막에 도달한 사람들인데 굳이 그렇게 애써 말할 필요가 있었을까. 누가 들어오든 말든 자신의 삶과는 관련이 없을 텐데.


 많은 도련님들이 그랬듯이, 며칠 못 버티고 떠날 테니 귀찮게 하지 말고 떠나란 경고였을까. 아니면 바깥 사회에서 지식이나 도련님들이 자신들을 멸시했던 것에 대한 복수심일까. 아니면 그들의 마음속에도 '그래도 너 같은 도련님은 이렇게 전락하면 안 된다'는 조금의 연민이라도 남아있었기 때문일까.



그래서 돌아보니 입구가 조그만 달처럼 보였다. 조그만 달처럼 보일 만큼 깊이 들어왔구나 하고 돌아보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아무리 흐려도 역시 밖이 그리웠다. 시커먼 천장이 위에서 내리누르는 듯하면 아무래도 기분이 나쁜 법이다. - p.214


 주인공은 마침내 길잡이를 따라 갱으로 들어간다. 지하 세계는 들어가는 순간부터 지상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르다. 자신이 들고 간 등불이 없으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고, 허리는 제대로 펼 수도 없으며, 화약 냄새는 코를 마비시키고,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앞으로 얼마나 남아있는 지도 전혀 알 수 없다. 그렇게 지상 세계에 살던 고상한 주인공은 비로소 행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지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상의 세계에서 이론과 책에 둘러쌓여 살고, 노동하지 않는 지식인이라면 지하 세계 사람들의 노동을 알 리가 없다. 하지만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조지 오웰도 탄광을 직접 체험하고 쓴 글이 있다. ('위건 부두로 가는 길'에 실려 있다.)  당시에는 주요 에너지 공급원인 석탄을 수많은 노동자들이 광산에서 직접 캐내야만 했다. 그렇게 지하 세계 사람들의 노동으로 얻은 석탄은 지상 세계의 삶을 유지하는데 쓰였다. 오웰은 그런 지상의 사람들이야말로 한 명의 노동자가 얼마나 많은 석탄을 만들며 건강을 해치는지 알아야 한다고 적었다.



밑으로, 밑으로


"이보라고, 이런 밑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도 있잖아. 너도 할 수 있겠어?" 나는 가슴이 물에 잠길 때까지 구부려 동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안쪽 전체가 희미하게 밝았다. 밝다고는 해도 뚜렷한 데가 없고 종잡을 수 없었다. 넓은 곳에 희미한 불을 억지로 켜놓아 빛이 제대로 퍼지지 못하기 때문에 애써 켜둔 불이 어둠에 압도되어 막연하게 흐릿한 상태였다. - p.253


 사다리를 타고 지하로 내려갈수록 공기는 탁해지고 힘은 점점 빠진다. 드디어 도착한 마지막 갱은 차가운 물이 허리까지 차오르지만 그곳에서도 일하는 갱부가 있다. 주인공은 자신이 갱의 끝에서는 일하지 못하겠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래도 매일 끝까지 내려올 필요는 없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며 다시 길잡이를 따라 올라간다.


 길잡이는 사뭇 자신감이 찬 주인공을 내버려 두고 먼저 올라간다. 주인공은 끊임없이 오르지만 이미 힘이 다 빠져 '그저 여기서 죽는 게 낫지 않을까'라 포기했다가도 '그래도 여기선 죽을 수 없다'고 다짐한다. '죽더라도 고상한 계곤 폭포에서 죽어야 한다' 이유가 진지하면서도 치기 어린 동기라 느껴졌다.


그때 내가 그 갱부의 말을 듣고 첫째로 놀란 것은 그의 교육 수준이었다. 교육을 받은 데서 나오는 고상한 감정이었다. 그는 갱부가 죽었다 깨어나도 알 턱이 없는 한자어를 아주 편안하게, 마치 어제까지 가정 내에서 일상적으로 써왔던 것처럼 구사했다. - p.278


 올라가던 길을 잃고 헤매는 주인공은 또 다른 갱부 '야스'씨를 만난다. 야스 씨는 다른 갱부들과는 달리 주인공처럼 도쿄 출신의 지식인이었다. 하지만 도쿄에서 저지른 죄 - 사랑의 삼각관계 같은 - 때문에 갱부로 전락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말한다.


 야스 씨는 전락한 삶은 죽음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며 반드시 도쿄로 돌아가라고 말한다. 전락이 죽음보다 나쁜 이유는, 전락한 삶이 주위 사람들을 계속 끌어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자신이 힘들 때 주위 누군가가 전락한 삶 - 다단계로 돈을 번다든가 - 을 택하는 것을 본다면, 나도 저런 거나 해볼까 하며 기웃거리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죽음은 한 사람의 끝이지만, 전락한 삶은 이어지며 주위 사람들을 끌어들이듯이.




갱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의사는 코 아래 손을 댔다.
"어떻습니까? 갱부가 될 수 있겠습니까?"
"안 돼."
"어디가 안 좋습니까?"
"지금 써줄게."
의사는 네모난 종잇조각에 뭔가 써서 내던지듯이 내게 건넸다. 들여다보니 기관지염이라고 쓰여 있었다. - p.310


 주인공은 야스 씨의 말을 듣고도 갱부가 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하지만 건강검진에서 폐병 판정을 받아 갱부가 되지 못하고 장부 정리를 하는 사무직이 된다. 그렇게 몇 달 지내다가 그는 도쿄로 돌아가게 된다.


 끊임없이 갱부가 되겠다는 다짐을 하며, 주위의 반대를 물리치고, 갖은 고생을 하며 갱을 다녀왔음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갱부가 될 수 없었다. 의사의 한 마디가 적힌 서류가 그의 모든 경험보다 강했다. 이렇게 인간을 판단하고 분류하는 시스템 앞에서는 한 개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그저 시스템이 정해주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현실적인 느낌을 주기도 했다.


 비록 갱부가 되지 못했더라도, 주인공은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 자신이 살아왔던 지상의 세계가 전부는 아니며, 노동은 생각보다 힘든 것이고, 전락한 존재들로 보였던 갱부들이 자신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사람이라는,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현실적인 사실들이다.




형이상학이 무너진 시대에는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는 절대적으로 여겨지던 신에 대한 믿음이 무너지던 시기였다. 자연스레 작가들은  인간은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소세키보다 한 세대쯤 앞선 톨스토이는 '지식인이라는 허위를 버리고 직접 노동하며 살아야 한다'는 방법을 제시했다. 지금이야 지극히 당연한 주장이지만, 불과 150년 전만 해도 귀족과 농노가 공존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소세키도 지식인들, 혹은 도시에 사는 젊은이들이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기보다는, 노동을 하며 스스로 살아가도록 애쓰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과연 그게 진부한 주장일까. 오늘날에도 여전히 지식인들은 노동자의 삶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알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을까. 그것은 그들의 삶이고, 나는 나 자신의 삶을 살아가면 그만이지 않을까. 지식인은 가만히 앉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을 하는 게 진짜 옳은 일일까. 적어도 오늘날까지 이름이 알려진 위대한 작가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농민들과 함께한 톨스토이와 수많은 사람들과 교류했던 도스토옙스키가 대표적이다. 그들은 자신의 삶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끊임없이 의심했다. 이렇게 사는 삶이 진짜로 옳은 삶인가? 나 자신에게도 그대로 되물어야 할 질문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끼는 작품이라는데,


 무라카미 하루키 씨가 문학적 선배인 소세키의 작품 중에서도 '갱부'를 아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읽고 나니 무엇보다도 주제 의식에서 동질성이 짙게 느껴졌다. 하루키 씨의 장편 소설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공통된 주제는 '직면하는 게 고통스러울지라도, 그래야 할 때 직면하지 않으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이다.


 이는 '갱부'에서 야스 씨의 모습과 지극히 대조적이다. 야스 씨는 자신이 저지른 죄를 속죄한다고 여기며 매일 광석을 캔다. 하지만 타인에게 죄를 저질렀다면, 피해를 받은 타인을 향한 행동만이 진정한 속죄다. 스스로 고통받으며 속죄하고 있다고 한들, 그 방향이 자신을 향하면 그건 자신만의 위안이자 도피일 뿐이다. 그러기에 야스 씨는 회피하는 인간일 뿐이다.


 고통 앞에서, 문제 앞에서 잠시 눈을 감아 회피하고, 덮어두기는 너무나도 쉽다. 마치 일본 정부에서 과거를 슬쩍 덮으려는 것처럼 말이다. 물론 타국을 비판하기 전에, 우리 정부 역시 스스로에게 불리한 일을 슬쩍 덮는 건 마찬가지다. 더 작게는 나 스스로도 슬쩍 넘어가려 할 때가 많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그런 쉬운 유혹 앞에서, 우리는 아파도 직면해야만 한다. 비록 매 순간 그렇게 살지 못한다 할 지라도, 그렇게 살도록 해야 하며, 그렇게 사는 게 올바른 것이라는 의식은 가져야 한다. 하루키 씨가 언제나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당연한 이치였고, 야스 씨를 보며 소세키로부터 동질감을 느낀 게 아닐까 싶다.




소설이 되지도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내가 갱부에 대해 경험한 것은 이것뿐이다. 그리고 모든게 사실이다. 소설이 되지도 못했다는 것이 그 증거다. - p.316


재밌게도 소세키는 마지막 문장에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니 소설이 되지도 못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한 소설은 무엇이었을까. 더 나아가서 소설이란 어떤 특징을 가져야 하는가, 그런 마지막 의문을 남긴 채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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