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에 대한 고찰
일본계 영국 작가인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을 접한 것은 최근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2017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은 어렴풋이 들어서 이름은 알았지만, 굳이 그의 작품을 읽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었습니다. 올해 1월, 왠지 모르겠지만 갑자기 읽어야겠다는 생각에 그의 소설 중 하나를 빌려서 읽었습니다. 가장 유명하다고 알려진 ‘남아 있는 나날’ 이었죠.
소설을 몇 쪽 읽다가 상당히 놀랐습니다. 오랜만에 정말 잘 쓴 소설을 만났다는 기분이었죠. 도입부의 매끄러운 전개 방식, 결말이 궁금한 스토리, 책의 남은 부분이 줄어드는 게 안타까운 마음까지. 소설 속 세계에서 나오고 싶지 않다는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이후로 이시구로씨의 ‘파묻힌 거인’과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차례대로 읽었습니다. 각 작품마다 그 소재와 줄거리가 달랐음에도 여전히 글은 좋았습니다.
이번 4월에 이시구로씨가 노벨상 수상 이후로 첫 장편 소설을 내놓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클라라와 태양’이라는 제목의 SF 소설이었죠. 개인적으로는 SF 소설을 상당히 싫어하지만, 그럼에도 이시구로씨의 작품이라면 읽어 볼 가치가 있다는 생각에 구매를 미룰 수 없었습니다.
소설 ‘클라라와 태양’은 사춘기 무렵의 한 소녀 ‘조시’와 그녀의 인공 친구(Artificial Friend, 줄여서 AF) 인 ‘클라라’ 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지금보다 로봇기술이 발달한 미래이기에 클라라는 로봇임에도 인간과의 교류에 전혀 문제가 없는 모습으로 그려지죠. 이 작품에서 이시구로씨는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지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고 느꼈습니다. 인공지능이 무섭게 발전하는 오늘날에 걸맞은 질문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소설은 클라라의 관점을 따라 전개됩니다. 여기서 클라라는 조시를 만나기 전까진 세상 경험이 없었기에, 클라라가 세상을 바라보는 모습이 꽤나 낯설면서도 신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예를 들어 클라라의 시각으로 바라본 세상이 여러 구획으로 나눠졌다는 표현이 그러했죠. 혹은 인간의 아주 작은 행동 변화를 관찰하여 감정을 추론해 내는 모습도 마찬가지라 할 수 있겠습니다. 어린아이가 세상을 배우며 성장하는 모습을 따라가는 느낌이랑 비슷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조시는 클라라를 자신의 인공 친구로 선택합니다. 정확히는 조시의 어머니가 클라라를 원했다는데, 클라라가 아픈 조시를 대신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조시 어머니의 희망 때문이었죠. 클라라의 뛰어난 관찰력과 기억력으로 조시의 모든 행동을 기억할 수 있다면, 언젠가는 조시가 사라지더라도 그녀를 대체할 수 있으리라 믿었겠지요.
처음에 클라라는 조시의 어머니로부터 그러한 이유를 듣고 그렇게 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시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행동을 바라보며, 클라라는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조시의 아버지도, 조시의 오랜 소꿉친구였던 릭도, 언젠가는 조시가 괜찮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그러한 희망은 각자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 것임에도 말이죠. 그러기에 클라라는 조시를 대체하는 것보다 조시를 낫게 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클라라는 어떻게 하면 조시를 낫게 할 수 있을지를 찾으려 애씁니다. 그러던 중, 클라라는 태양이 답을 제시해 주지 않을까 하고 여기게 됩니다. 물론 자신이 햇빛을 받아 에너지를 얻는 로봇이기도 하지만, 분명 이전에 길가에 쓰러져 있던 한 인간 또한 햇빛을 받고 살아나는 모습을 보았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죠. 그런 햇빛은 검은 공해를 만드는 ‘쿠팅트 머신’에 의해 가려지곤 합니다. 그러기에 클라라는 자신의 일부를 희생하여 쿠팅트 머신을 파괴하게 됩니다.
그러나 쿠팅트 머신 한 개를 없앴다고 해서 세상의 모든 공해가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조시는 이후 더 아파지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 조시를 걱정하고 있을 때, 조시의 방에 클라라가 들어섭니다. 방 안에서 클라라는 다시금 햇빛을 떠올리고,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려 햇빛이 조시를 비추게 합니다. 분명히 그것 때문이었을까요. 조시는 점차 회복하기 시작하여 끝내는 건강한 인간으로 바뀌게 됩니다.
작품 곳곳에서 인간과 로봇이 다른 점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들이 나옵니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물질적인 요소 외에, 추상적인 어떠한 것, 혹은 감정이라 부를만한 것이 있을까요? 만일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결코 클라라는 조시를 대신할 수 없을 겁니다. 반면 그렇지 않았더라면 조시는 클라라의 몸 안에서 새로운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었겠죠. 작품 속 클라라의 행동과 모습을 생각해 봤을 땐, 이시구로 씨는 분명히 인간은 물질적인 것 이외에 더한 것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려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만일 클라라가 논리적이고 이성적으로만 판단하는 존재였다면, 그녀는 결코 조시를 살리려고 하지 않았을 듯합니다. 애초에 자신이 모르는 어떠한 것에 희망을 거는 모습이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조시를 도우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겠지요. 설령 그렇게 아주 작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할지라도, 확률에 따라 결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나 클라라는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의 선택을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저는 조시를 배우기 위해서 최선을 다 했고, 그래야만 했다면 최선을 다해서 그렇게 했을 거예요.
하지만 잘 되었을 것 같지는 않아요. 제가 정확하게 하지 못해서가 아니라요.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어머니, 릭, 가정부 멜라니아, 아버지. 그 사람들이 가슴속에서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가 없었을 거에요. "
클라라는 결코 자신이 조신을 대신할 수 없었을 거라 여깁니다.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에는 다가갈 수가 없기 때문이라 말하면서요. 그러나 인간, 혹은 우리 역시 자신의 감정을 정확히 알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정확히 조절하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사람의 감정이라 할 수 있을까요. 애초에 그렇게 판단이 가능한 지점은 이미 감정의 영역을 벗어난 것일까요.
감정과 대비되는 이성적인 판단은 언제나 확실한 근거를 그 바탕으로 합니다. 반면 감정에는 언제나 설명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첨가되어 있죠. 어쩌면 그런 불확실성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연에서 가장 작은 단위로 내려가면 이해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상존하듯이 말이죠.
그러한 감정이 있기에 때론 이성적이지 않은 행동이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 작품에서 보이는 것처럼 아주 작은 희망을 포기하지 않거나,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타인을 사랑하는 모습, 혹은 타인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는 행동이 그 예라 할 수 있겠죠. 물론 이러한 행동을 모두가 따라야 한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겠지만, 적어도 그런 행동이 어떠한 울림을 주는 것은 분명한 듯이 보입니다.
그렇지만 한편으론, 진정한 어른이라면 때론 그런 행동을 보여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한 개인으로 본다면, 아이가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한 시기라면, 어른은 받았던 사랑을 돌려주어야 할 시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 나아가서 사회 속에서는, 자신이 속한 세대에서 능력껏 타인과 교류하며 사는 게 진짜 어른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자신이 활동할 시대가 지나고 나면, 조시를 보내고 남은 클라라처럼 수많은 남겨진 것들이 모이는 들판에 서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클라라가 자신과 조시가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그리고 다음 세대인 조시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는 점을 기억하면서, 저물어 가는 태양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속의 쓸쓸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시구로씨의 작품에서 언제나 느껴지는 과거에 대한 쓸쓸한 향수와 같은 감정은 언제나 인상적입니다. 또한 그의 다른 작품과 마찬가지로 소설 도입부는 매끄러워서 읽기가 참 편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쓰기까지 수많은 창작과 수정이 필요했겠지요.
이 소설은 혁신적인 과학기술이 등장하는 SF 세계보다는, 오로지 인간과 조금 더 나은 로봇이 상존하는 세계를 그립니다. 그리고 인간보다 때론 더 인간다운 로봇과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어쩌면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부분을 다루고 있는 작품일지도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