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준 시집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by 별이언니

을 읽고

*

줄무늬를 슬퍼하는 기린처럼. 글자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고 잠시 생각한다. 기린에게 줄무늬는 숙명인데, 영원히 떼어놓을 수 없는 천명인데. 내가 지니고 태어나 무덤으로 가져갈 나의 무엇을 슬퍼하노라니, 그의 일생이 슬픔이고

**

그러므로 그 슬픔은 격렬하거나 뜨겁지 않고 데리고 살만한 밀도와 중량일텐데. 그게 더 괴롭지 않나. 나락에 떨어지면 하얗게 태운 후 회복되기라도 하지, 은은한 슬픔에 계속 데이며 산다는 것은 얼마나

***

그러니 그는 슬픔을 바라보느라 눈이 깊어질 밖에. 세상의 모든 사물에 창을 내고 들여다볼 밖에. 바로 바라보기에는 슬픔이 깊으니 창을 건너 바라보아야만 하고,

****

세상 모든 사물 속 잠자는 말을 듣느라 비몽사몽의 긴 꿈을 건너가기도 하지. 그런데 그 꿈이라는 것이 그에게 생생할려나. 슬픈 사람은 깨어서도 잠들고 낮에도 꿈을 꾸며 걷는다는데

*****

어스름에 가까운 말, 더듬이에 가까운 말, 흐려져서 스미는 말. 어느 시는 저녁 찬 바람처럼 모르는 사이 몸에 스미고 손가락을 차게 만든다. 이 서늘한 슬픔이란.

매거진의 이전글눈이 내리는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