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는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 그 날, 장을 보러 가다가 서점을 지나는데 신간이 나왔다고 문에 붙여놨지 뭐니.
어머니는 장을 볼 돈으로 책을 사셨고, 그 날 저녁 밥상에는 밥과 된장국, 김치 그리고 책 한 권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가만히 책을 내려다 보시더니 이내 숟가락을 들고 말씀하셨다.
- 잘했어.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삽십 몇 년, 아직도 어머니는 아버지 제사상 앞에서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리신다. 난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를 골똘히 생각한다.
- 친구들이랑 전기구이 통닭집에서 놀다가 집에 돌아오는데 누가 따라오지 뭐야. 네 아버지가 헐레벌떡 따라오더니 대뜸 내 긴 머리에 반했다고 하는거야.
- 엄마는 무섭지도 않았어? 이상하지 않았어?
- 그게 참 이상하지. 네 아버지 눈을 쳐다보는데 뭔지 모르게 안심이 되더라.
아버지는 전기구이 통닭집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긴 머리에 말수가 적었던 어머니에게 첫눈에 반했다고 했단다. 정확히 말하면 어머니의 긴 머리에 반했다고 했단다. 머리가 긴 여자가 대한민국에 얼마나 많았을텐데, 그건 무슨 끌림이었을까.
어머니는 몸이 약하고 가냘프고 조용하고 꽃과 책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월급날 길에서 구걸하는 이를 만나면 봉투째 건네주고 오는 버릇이 있어 종종 쌀이 떨어지고 연탄외상값이 밀렸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마당 가득 꽃을 가꿨다. 밥상은 허전해도 우리집 정원은 사철 꽃이 피었다. 장을 볼 돈으로 책을 사고 장미 묘종을 사는 어머니를 아버지는 사랑했다. 그리고 어느 겨울밤, 내가 태어났다.
이사를 하다가 잃어버린, 카세트 테이프에 녹음된 아버지의 목소리가 내게는 유일하게 남은 아버지의 실감이다. 아버지가 알아듣지 못할 언어로 말을 걸면 내가 옹알이로 대답하는, 기묘하게 통하는 대화. 아버지는 나의 옹알거림을 차분하게 다 듣고 나서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다. 그래.
그렇구나,
하고.
어리고 아픈 딸을 데리고 어두운 골방에 앉아 그 딸의 이마를 쓰다듬으며 알아들을 수 없는 이국어로 중얼거리던 아버지를 가만히 더듬어본다. 걸핏하면 기침을 하고 열이 오르는 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버지의 마음속엔 어떤 감정이 흘렀을까.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목소리만 남은 아버지.
목소리를 이불처럼 덮고 나는 가만히 웅크린다. 감정 속에서 설탕인형처럼 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