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질만큼 비가 내렸는데 질리지도 않고 비가 또 내리네요. 오늘아침엔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비안개를 만났습니다. 가는 빗방울과 더운 공기가 만나면 안개의 숲이 열리죠. 다행히 오늘은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건너왔네요.
불투명한 비를 건너오니 문득 비의 아이가 생각났어요.
살면서 너머의 존재를 딱 두 번 만났어요. 아주 어렸을 때 만난 분은 매우 무서워서 그건 마음의 상자에 봉인. 덜컹덜컹.
중학교 2학년 즈음, 저는 비의 아이를 만났습니다.
딱 이즈음일까요, 조금 더 더워지려는 무렵이었을까요. 아니, 아마 봄이었을거에요. 비가 투명하고 쌀쌀했거든요.
저는 어렸을 적부터 맑은 날을 좋아했어요. 그날도 우산을 써도 속절없이 젖어가는 운동화를 바라보며 속상한 마음을 누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 아- 이 비를 어떻게 지나가나. 이 비를 지나가 현관에 서면 그때 젖은 몸은 어떻게 수습하나. 이런 아이답지 못한 생각을 하면서요.
문득 속눈썹 끝을 스치는 빗방울이 느리게 떨어지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사방이 고요해졌어요. 빗방울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바람에 흩날렸죠.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요.
그리고 나는 소리를 들었어요. 사람의 말은 아니지만 나를 부르는 것만 같은 소리를.
고개를 들어보니 전봇대 위 전선에 걸터앉아 나를 보며 싱글싱글 웃는 아이가 있었어요. 반투명한 몸으로 빗방울이 청량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고 달아났어요. 물로 빚은 아이구나. 나는 눈앞에 펼쳐진 비정상적인 풍경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않고 찬탄했어요. 너무 아름다웠거든요.
아이는 천진하게 하지만 묘하게 어른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계속 나를 바라봤어요. 마음이 아플만큼 순수하고 맑았어요.
하지만 눈을 깜박이는 찰나 아이는 사라졌어요. 허공에 빛나는 호선을 잠깐 그리고 이내 그조차 사라졌죠. 다시 사방은 비내리는 소리로 요란해졌어요. 빗방울들은 더 격렬하게 내게 와 부딪쳤죠. 소매끝과 머리카락이 삽시간에 젖었어요. 나는 물에 빠진 생쥐꼴이 되어 집에 도착했고 우산을 제대로 쓰고 다니라는 꾸지람을 들었어요.
그 이후로 비가 내리는 날이면 가끔 나는 비의 아이를 생각해요.
비가 내리면 마음을 앓는 버릇이 생길 것이라는 걸 비의 아이는 예감한 것일까요. 그래서 내게 나타나 비내리는 날 너무 슬퍼하지 말라고 빛나는 미소를 보여준 것일까요.
오늘은 비의 아이가 우리에게 오는 날.
한번쯤 다시 만나고 싶은데, 더께가 낀 마음을 품고 산지 오래라 내 눈에는 더이상 보이지 않나봐요. 하지만 -
만약 우산을 들고 운동화 끝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아주 작은 마음의 아이가 있다면,
빗방울을 잠시 멈추고 비의 아이가 나타나겠죠. 물기 가득한 마음에 빛나는 미소를 걸어주기 위해.
빗방울의 내면에 고인 빛을 보여주기 위해.
이 많은 빗방울이 풀잎에, 우산에, 사람들의 머리카락에 맺히고 사라지면 빛들이 풀려나는 거야. 그래서 비가 개인 후 공기는 그렇게나 싱그러운 거란다.
속삭이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