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학 시집 <나보다 더 오래 내게 다가온 사람>

by 별이언니

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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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이나 삶같은 말은 너무 철학적이고 인생이란 말은 너무 상투적이고 ···· 중얼거리며 창밖을 보니 비다. 올봄은 참 비가 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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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림이란 말은 어떨까. 창틀에 턱을 괴고 비구경을 하다가 문득 떠올린다. 생활이란 말은 이제 너무 종이의 권속이 되었다. 입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말이 어느덧 고풍스러운 문장이 되는 일은 고리타분하다. 그런데 말할 일이 줄어들고 읽는 일만 늘어나니 벽이라도 보고 말하는 연습을 좀 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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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너희 집 살림은 좀 어떠니? 담위에 부침개 담은 접시 하나 올려놓으며 묻는 살가움보다 더 치열한 무엇. 창틀에 상처가 덜 난 모과를 끼워두는 마음은 군내가 난다. 아무리 골라도 땅에 떨어진 모과는 금이 가 있고 곧 상하기 시작할 것이다. 진한 냄새를 풍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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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걸핏하면 사라지는 언어를 사랑해서 이렇게 살냄새 가득한 시를 만나면 어쩔 줄 모른다. 내가 비스듬히 지나가던 생의 모서리에 분명히 박혀있던 풍경들. 여행 중 들렀던 시골 마을의 담장 위에 유리조각이 가득 박혀 있었다. 색이 든 음료병을 깨어 박아둔 담은 이가 무딘 짐승처럼 반쯤 무너져 있었다. 키가 작은 나도 어렵지 않게 안을 넘겨다볼 수 있는 낮은 담. 풀 한포기 없는 마당엔 평상이 있고 채반 몇 개가 놓여 있었다. 무언가 푸르고 누런 것들이 말라가고 있었다. 유리 위에 손가락을 대어보았다. 너무 오래전에 박아두고 잊어서 둥글게 마모된 유리가 살을 파고들며 내는 소리가 들렸다. 신음같기도, 나즈막한 비명같기도, 입을 다물고 내는 경고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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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발되고 남은 자리엔 언제나 그림자가 남는다. 나는 치마를 걷어올리고 깨금발로 깡총 - 뛰어건너기도 하는데. 오늘은 가만히 저 비웅덩이를 바라본다. 비 사이로 언듯 사람이 지나가고 나는 그가 끌고 가는 어떤 살림의 안부를 묻는다. 우리가 거하고 있는 이 신파의 행방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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