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철 <사랑의 무늬들>

by 별이언니
시 쓴 대로 현실에서 이뤄지는 걸 '시참'이라고 해요.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 같"다고 쓰니까 그대로 되었잖아. 백석, 이 바보야! 백석이 「통영 2」를 쓴 그 이듬해,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1937년 4월 7일 박경련은 신현중과 결혼해요. "남쪽 바닷가 어떤 낡은 항구의 처녀 하나를 나는 좋아하였습니다. 머리가 까맣고 눈이 크고 코가 높고 목이 패고 키가 호리낭창하였습니다"(산문 「편지」)라던 그녀를 백석은 영영 잃어버렸습니다.

- 이병철 사진 에세이 <통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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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쓸쓸하여 기어이 맥주 한 캔을 딴다. 고적한 밤, 창을 열면 이웃들은 모두 불을 끄고 잠이 들었다. 흑맥주에는 초콜릿이 어울린다고 말하며 나는 초콜릿을 부숴 혓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그 젊고 찬란하던 시절의 어느 밤이 별똥별처럼 떨어진다.


사방에 사랑의 흔적을 남겨두고 시인은 어떻게 사나. 기어이 실루엣조차 남기지 않은, 철저한 타인들의 즐거움이 묻어난 아름다운 사진들 사이로 잃어버린 사랑에 대한 고백이 끝없다. 여행을 하는 일, 사랑을 하는 일, 여행지를 떠도는 일, 사랑의 기억을 헤매는 일 - 모두 미로의 일이다. 입구는 있지만 출구는 없는 일.


해가 지고 밤이 오고 서툰 요리를 만들고 와인을 따고 여행 가방 안에 챙겨온 가장 멋진 옷을 입고 낯선 골목을 뛰어가는 일, 청춘의 일이라 애틋한가, 멀리 물러섰지만 한 번도 잃은 적도, 잊은 적도 없는 사랑이라 그런가. 시인은 멀리 파리를, 모로코를, 프라하를, 부다페스트를, 그리스를, 캐나다를, 통영을 부른다. 그게 어디든, '당신과 함께 있었던 어느 시절'을. 사진은 아름다운 장소를 보여주고 문장은 공간을 미끄러지지만 마음은 오로지 당신에게 고여있다. 시인의 사랑이 너무 애틋하여 나는 창을 닫을 수가 없었다. 도시의 불빛으로 가려져 보이지 않는 별을 찾았다.


나는 사랑의 기억을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오래 바라보다가 꽃삽으로 한 뼘 땅을 파고 묻었다. 금방이라도 찾을 수 있게, 아주 조금만 땅을 파고 묻었다. 눈물을 떨어뜨렸고 곧 비가 내려서 계절이 바뀌자 그 자리는 무성한 꽃자리로 바뀌었다. 사랑의 기억이 울창해지고 나는 향긋한 꽃그늘 아래 누워 눈을 감았다. 탐욕스러운 사랑이 나를 제 그늘로 데려가 이윽고 내 살과 뼈가 흩어져 새로운 꽃이 핀다면 -


사랑하는 연인들이여, 내 앞을 지나며 환히 웃어주렴. 내가 사랑했던 사람아, 내 향기에 감탄하며 사진이라도 찍어주렴.


사랑의 기억은 세상의 무늬가 되고 유랑하는 자의 발자국이 된다. 오래 마음을 앓는 사람의 병이 견딜 수 있는 아름다움이길 바란다. 내게 사랑이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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