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르조 아감벤 <행간>

by 별이언니
적어도 우리가 용기를 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언어의 마지막 법칙이란, 단 하나의 용어 안에 거주할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언어적인 상징들이 언어가 가리키는 것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이며, 어쨌든, a는 b의 도움 없이 무언가를 가리킬 능력이 없고 b도 마찬가지로 a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에, 다시 말해 a든 b든 서로 간의 상대적인 차이가 아니면 존재할 가치가 없거나, 혹은 둘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즉 그 자체의 어느 한 부분(예를 들어 "뿌리") 뿐만 아니라 이렇듯 무질서하게 얽혀 있는 영원히 부정적인 차이점들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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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격, 허방, 발이 빠지는 일, 실종되는 것, 사라짐, 증발, 소문.


그런 단어들만 생각했다. 길을 걷다가 문득 꽃집 앞에 멈췄다.


며칠 전 마른 꽃을 사서 물도 담지 않은 빈 화병에 꽂아두었다. 적당히 쓸쓸하고 좋았다.


오늘 내 눈앞에는 더위에 시들고 있는 연한 꽃잎들이 있었다. 나는 그 부드러운 꽃잎들을 끌어안고 사무실로 돌아왔다. 정수기에서 찬물을 담아 꽃이 달린 두 줄기를 꽂았다.


그건 사람과 닮았다. 서로 기대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존재라 그렇게 생겼다는 人. 나는 다시 행간, 아감벤이 말한 간격, 유령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마음, 사랑이 불러일으키는 치명적인 병에 대해 그렇게 많은 인용을 하며 써 내려간 그의 문장과 문장 사이 깊고 서늘한 행간에 대해.


두 번째 시집의 제목을 멜랑콜리아로 짓고 싶었지만 이미 유명한 시집이 있었다. 그 무렵의 나는 검은 담즙에 매료되어 그것을 꺼내 햇볕에 말려보았다. 푸른 핏방울이 점점이 남았고, 출판사에 보내는 원고 첫 장에 '푸른 피'라고 적어 보냈다. 나는 우울을 만드는 피를 믿었다. 그것이 뇌의 착각이라거나 호르몬의 착란이라고 믿고 싶지 않았다. 우울이 키우는 자그마한 장기가 있어 거기서 조금씩 불순한 피를 만든다고 믿었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거나 누군가를 열렬히 사랑하거나 내겐 늘 이인칭의 대상이 있었고, 신뢰하는 선배는 내게 '너에게 당신은 세계다'라는 말을 남겨주었다. 눈보라 속에서 몸이 식는 줄도 모르고 떨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내게 탈속하여 세상을 버린 옛 스승은 네 안에 불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다른 세상으로 건너갈 수 있을 거야,라고 말씀해 주었다. 다른 세상을 보기 위해 그렇게도 아무렇지 않게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의 말 따위는 듣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맑은 세상으로 건너가느니 이 세상에서 더 사랑하고 더 눈물 흘리고 더 많은 시를 쓰겠노라고. 스승은 내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지만 여전히 나는 이 속된 세상이 좋다. 망가지고 상했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곳. 시는 혼탁한 사람들의 아름다움에 뿌리를 내리고 피는 꽃이라고 믿기 때문에. 내가 사랑하는 당신이 있기 때문에. 여기가 나의 세계이므로.


아감벤의 이 아름다운 텍스트는 갈망하지만 잡을 수 없는 것, 가려져서 형체가 불분명하지만 분명 매혹적인 것, '부재와 현존 사이의 실체화할 수 없는 부정적 관계', 노래하며 사로잡는 유령을 부른다. 사랑은 살과 피를 가진 당신인가, 만질 수 없지만 손톱 끝까지 통증을 실어 나르는 나의 영혼인가. 사랑은 나를 거절한 여인 앞에서 또 다른 사랑을 찾았노라며 물에 비친 여인의 환영에 반지를 떨어뜨리는 일이다. 허구는 필연적이고 완성된 현실은 허구다. 그 사이 유령은 부재하는 존재로 서성거린다. 가장 아름다운 것, 우리가 열렬히 갈망하는 것은 유령의 옷자락. 만질 수 없는 부재, 하지만 분명 거기 어른거리는 이미지다. 아감벤의 문장은 수많은 텍스트들을 호출하며 열렬히 나부낀다. 그것이 되려 사랑으로 느껴질 만큼.


왜 세상엔 이렇게 많은 사랑 노래가 불리고, 사랑의 시들이 쓰이는지 생각했다. 그건 아무리 쫓아도 닿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저주고, 치료되지 않는 중독이며, 우울이 파먹는 생기 - 여위고 사라지는 병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서로 기대지 않으면 무너지기 때문에 사람 인자는 저렇게 생겼지만 저 사이 눈에 띄지 않는 한 점의 간격이 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일들은 다 그 허방에서 기어올라온다. 무저갱의 괴물들처럼.


구름이 나를 지나가고 나와 꽃 두 줄기는 삽시간에 어두워졌다. 하지만 곧 뜨거운 열기가 나를 사로잡았다. 꽃은 시들 것이다. 밑에서부터 하나씩 시들고 또 피어날 거라고 꽃집 사장님은 말했다. 시들기 때문에 꽃은 덧없고 덧없기 때문에 꽃은 아름답다. 꽃이 저문 자리는 곧 그런 일조차 없었다는 듯 깨끗이 지워져 다른 계절의 흔적으로 뒤덮이겠지만 나는 기억한다. 그 자리에 꽃이 있었고 향기가 가득했다는 것을. 사라진 꽃그늘에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시를 쓴다. 그건 꽃잎의 시, 꽃잎 뒤편에 종종 쓰는 나의 사랑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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