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기를 쓰며 손가락이 저절로 유월을 향한다. 유월, 내가 좋아하는 초여름의 시간.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따듯하고 그래서 꼭 유령같은 시간. 땀이 흐르다 식으면 서늘한 손 하나 불쑥 몸속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시간. 덥다가 서늘한 경계가 또렷해 저물녘 해그림자에 몸을 섞고 차 한 잔, 술 한 병 마시기 좋은 계절. 그런 경계를 지나고 있어서 인가 했다.
나를 선명하게 만들기에는, 나를 또렷하게 그리기에는 무서운 날들. 선명한 나는, 또렷한 나는 이 시간들을 분명히 견디지 못할테니까 나를 조금 눌러앉힌다. 고요하게, 희미하게, 잠들 듯 지나간다, 어느 날들은.
감정을 흔들까봐 아무 것도 읽지 않고 쓰는 일도 게을리 하고 눈을 반쯤 감고 귀를 반쯤 닫고 펄럭거리는 영혼을 갈무리해 관짝같은 잠옷에 담아두고 봄이 깊어질 때까지, 아니 봄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다. 이 봄은 내겐
아마도 어떤 기다림과 같은 것이어서.
봄의 바다는 무겁고 답답해서 좋다. 봄바다를 지나가는 것들. 올봄 나는 손을 흔들 힘도 없이 졸며 뒷모습 그림자에 발을 담근다. 유월이 오면 무언가 지나가겠지. 나는 달라지겠지. 조금 무겁고 조금 둔해질지도, 조금 마르고 조금 희미해질지도, 바람에 노래라도
핏방울처럼 섞을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