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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용임 Jul 06. 2024

존 밴빌, 바다

당신의 최초의 죽음은 언제였는가. 어떤 모양, 어떤 질감이었는가. 어떤 냄새가 났는가.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했다. 생기가 사라진 장면 속에서 당신에게 다가온 죽음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가.

책을 읽는 내내 줄곧 생각했다. 떠올리려고 애썼다.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죽음에 대해. 그러니까 시간적인 의미의 처음은 아니다. 나의 의지로 기꺼이 모든 움직임을 봉인하고 하나의 선명한 이미지로 만들어서까지 영혼에 끼워 넣은 죽음. 나를 변화시킨 죽음. 어떤 죽음이든 죽음에 닿은 것은 온전치 않다. 죽음을 넘어선 생명이 과연 온전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어릴 적에 새를 묻어주었다. 네 살 무렵, 그즈음의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길섶에 새 한 마리가 죽어있었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온전한 모습이었다. 서있던 새를 누가 쓰러뜨려 놓은 듯 지나치게 뻣뻣하고 수상한 자세로 옆으로 누워있었다. 멀리서 보았지만 한눈에 알았다. 저것은 죽음이다. 손을 들어 새를 가리키며 나는 큰소리로 외쳤다. 새가 죽었다 - 엄마는 거칠게 내 손을 잡아끌었다. 만지지 마! 내가 한 발자국이라도 새에게 다가갈까 봐 엄마는 필사적이었다. 더럽다, 가까이 가지 마! 끌려가며 나는 계속 뒤돌아보았다. 새가 점이 되고 이내 사라질 때까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내내 새를 생각했다. 엄마가 장 봐온 물건들을 부엌에서 정리하는 사이 나는 새에게 달려갔다. 신발을 구겨 신고 현관을 조심스럽게 열고 그리고 뛰었다. 새는 그대로 있었다. 눈은 호동그레 뜨고 깃털은 거칠었다. 새 앞에 한참을 앉아 있다가 돌을 들어 땅을 팠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을 알았다. 제법 깊게 땅을 판 후 새를 들어 구덩이에 놓았다.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탁탁 쳐서 표면을 정리하고 돌을 쌓아 올리고 나뭇가지와 잎사귀를 얹었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엄청나게 혼이 났다. 욕실로 끌려가 비누칠을 하고 손이 없어질 것처럼 박박 문질러 씻었다. 더럽게! 엄마는 계속 중얼거렸다. 더럽게! 죽음은 더러운 것이었다. 손이 빨개졌지만 영혼에 든 얼룩은 지지 않았다. 나에게 깃든 죽음은 계속 변주하며 나에게 찾아왔다. 그때마다 나는 조금씩 상해갔다. 죽음에게 조금씩 생기를 내주었고 가끔씩 죽음을 생각하고 자주 죽음을 썼다.

애나가 죽고 맥스는 바다를 찾는다. 그 바다는 맥스에게 찾아온 첫 번째 죽음이다. 쌍둥이 아이들을 나란히 삼킨 바다는 여전히 그곳에 있다. 여전히 여름이면 권태로운 표정의 사람들이 찾아와 나른하게 취하는 휴양지 인근의 바다. 살아있으되 도무지 온전할 수 없는 사람은 죽음에게로 돌아온다. 그를 상처 입힌 죽음에게. 그에게 깃든 첫 번째 죽음에게. 그 죽음 이후 계속 상해 가는 자신을 바라본다. 죽음을 바라보며 자신을 바라본다. 우리 모두 그러하듯이. 모두가 안다. 첫 죽음이 깃든 이후로는 속절없이 죽음에게 향한다. 도망가지 못한다. 죽음에게 나부낀다. 우리는 모두 죽음으로 가는 찰나를 살 뿐이다. 어느 물리학자가 말했듯 죽음이야말로 우주의 평범한 상태이니까. 생명은 이 차가운 죽음의 세계에서 너무나도 이질적인 변이다. 반짝이며 사라지는 여름철 바닷가의 불꽃놀이 같은 것이다.

소설 속 바다는 딱딱한 느낌이다. 그 속에 잠긴 것들은 모두 빠져나오지 못할 것처럼. 책을 읽는 사이 비가 시작되었다. 여름의 공기는 반쯤 액체다. 나는 빠져나올 수 없는 물에 갇혀서 걷고 앉고 잠들었다. 느리고 지루하게 책을 읽었다. 또 하나의 죽음을 만났다.

이 죽음 이후로도 나는 도무지 온전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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