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와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시간에는 힘이 있다. 희미해진다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때로는 뒤엉켰던 순간과 감정들을 차분히 걸러낸다. 그렇게 걸러진 기억의 조각들은 아무렇게나 손 닿는 대로 뻗어 꺼내어도 온통 애틋하기만 해서, 맞아,
그때 그랬었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공유한 이들의 마음을 하나로 엮는다. 그것이 좋은 순간이든 아니든, 지극히 평범한 순간이든, 혹은 아픈 순간이든.
우리의 여정에 포함되어 있는 두 번의 아그리투리스모 - 농가민박 - 중 첫 번째 숙소는 아이를 위한 것이었다. 동물들이 저마다의 소리로 아침을 깨우고, 푸르른 자연 속에 일상을 살아가는 곳. 눈부신 햇살을 한껏 받으며 농장 동물들과 교감하고, 정원 한가운데 그네를 타고, 그런 너는 얼마나 예쁠까.
여기까지가 우리가 상상한 그림이었다. 다행히도 우리 곁에는 ’ 날씨 요정‘을 자처하는 여행 메이트가 있어서, 온통 먹구름 투성인 이탈리아 일기예보를 이겨주리라 기대도 해보았건만, 잠깐 개었던 하늘은 다시 굵은 빗줄기를 쏟아내고 있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농가민박의 스산함이란. 토스카나 시골에 위치한 우리의 숙소는 깨끗했지만, 다소 오래된 냄새를 풍겼고, 어두웠으며, 농장과 붙어있어 파리까지 많았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 것을! 풍경과 정취만 누리려 했던 어리석음이 아니었을까. 먹구름이 온통 하늘을 뒤덮은 동안, 해는 저물었고 가라앉아 있던 여행의 피로가 스멀스멀 올라왔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길을 달려 도착한 근처 식당에는 정말이지 현지인들 뿐이라, 잠시 신기한 외지인 신세(?)가 되어 구경을 당하기까지 했으니!
그래도,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할까. 어쩌면 한 입 먹자마자 눈이 번쩍 뜨였던 투박한 티라미수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독일에서 이주해 와 대대로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다는 친절한 주인의 이야기일지도, 드넓은 목장을 누비던 동물들의 이야기일지도, 아이를 보자마자 다정한 눈빛으로 말을 걸어주던 할머니의 이야기일지도, 퉁퉁 부은 눈으로 아침의 창을 열었을 때 코끝에 닿던 달큼한 공기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겠다. 분명한 건, 조금 불편했던 기억들은 이미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우리의 이야기 속에서 힘을 얻지 못할 것이란 사실이다. 우리는, 유한한 시간이라는 기적 속에 살아가고 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