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조르노, 아이와 함께 떠나는 이탈리아 여행
내 옆자리에 앉은 금발머리의 여자아이는 말을 그리고 있었다. 한국에서 5학년을 마치고 왔지만, 나는 다시 5학년이 되었다. 독일어라고는 한마디도 하지 못한 채, 뭐가 필요한지도 몰라 가방에 필통과 빈 공책 하나 덩그러니 넣고 찾아간, 독일학교에서의 첫날이었다.
말이라니, 참 신기하다. 그것도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귀여운 캐리커처 같은 게 아니라, 동물도감에 실릴 법한, 말의 초상화 같은 그림이었다. 내가 그리고 내 한국 친구들이 그리는 동물 그림은 기껏해야 강아지, 고양이, 귀여운 사자, 호랑이 뭐 그런 것들이었는데.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말을 그린 독일 친구들이 꽤 있는 것 같았다. 신기하다…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둘씩 짝꿍을 지어 열을 맞춰 앉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세 개의 책상을 붙여 여섯 명이 한 그룹으로 서로를 마주 보게 앉은 것부터, 선생님이 교실에 있는데도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모습 하며, 모두가 만년필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까지. 나는 나 혼자 들고 있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진 연필을 만지작거리며 옆자리에 앉은 친구의 말 그림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멋지다, 잘 그렸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독일어가 없었다. 아는 것이라고는 아빠가 알려주고 간 화장실 위치뿐. 같은 조건에서 독일로 왔던 아빠 친구 목사님 아들이, 화장실 어디냐는 말을 독일어로 할 줄 몰라 참다가 결국 바지에 실수를 했다는 말을 듣고, 아빠는 화장실 위치부터 확인했던 것이다.
말을 그리던 여자아이는 이 날 하교하기 전, 나에게 그림을 그린 쪽지를 손에 쥐어주며 무언가를 설명했다. 침대, 태양, 9시, 뭐 이런 걸 표현한 그림이었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무슨 말인지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8시에 등교한 나는 텅 빈 교실에 홀로 서서야 친구가 설명하려 했던 말을 이해했다. 내일은 1교시가 없으니 9시까지 오란 말이었구나. 나는 혼자 텅 빈 교실에 앉아 한 시간을 기다렸다. 내 나이 열두 살이었다.
말이라는 동물을 떠올리면, 나는 꼭 그때 그 금발머리 친구가 떠오른다. 3개월 후 다른 독일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면서 그 얼굴조차 희미해졌지만, 그 친구의 그림 속에 있던, 매끈한 갈색 말은 여전히 선명하다. 초록과 앙증맞은 꽃들에 둘러싸인, 아래로는 발도르차 평원이 내려다보이는 우리 호텔에서는 승마클럽을 운영하고 있어서, 말을 타는 아이들이 많았다. 전날 저녁, 아이의 승마체험을 미리 예약해 둔 우리는 햇살 가득한 승마장으로 나갔다. 아이는 승마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채비를 마치고, 망아지를 끌고 나오고 있었다. 루나, 말의 이름은 루나라고 했다.
아이가 겪는 처음을 바라보는 엄마의 마음은 복잡하게 뒤엉킨다. 한없이 기특하고, 예뻐 보이다가도 그 위로 겹쳐지는 안쓰러운 마음과 대신 겪어주고 싶은 마음. 만 네 살의 저 작은 아이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러다 끝내 울컥, 하고야 마는, 의연한 척 손을 흔들고는 있지만 실은 아이보다 더 두려워하고 있을지도 모를, 엄마라는 어른아이. 아이는 이탈리아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말에 올랐고, 루나가 만들어내는 리듬에 맞춰 승마장을 세 바퀴쯤 돌았다. 아이의 아빠는 옆에서 아이의 등을 받쳐주며 함께 걸었다. 승마가 끝나자, 긴장하고 있던 아이가 그제야 웃는다. 루나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인사도 한다. 엄마도 그제야 마음껏 웃는다. 연우야, 여기 봐! 사진 찍어줄게! 하며. 아이가 토스카나, 그 황홀한 자연을 배경으로 말을 탔다는 사실도 그제야 떠올랐다. 잘했어, 잘했어! 아이를 꼭 안아주며, 입을 맞춘다.
그날 이후, 아이는 말을 좋아하는 아이가 되었다. 루나를 꼭 닮은 말 인형을 침대에 두고 자는 아이. 타고 다니는 킥보드에 말 인형 액세서리를 달고 루나야!라고 부르는 아이. 아이의 말에 대한 첫 기억은, 루나였다.
그리고 문득 생각한다. 독일어도 못하는 딸을 독일학교에 두고 가야 했을 아빠의 마음은 어땠을까. 학교 앞에 도착해 차에서 내리기 전, 아빠는 나를 위해 기도를 해주셨다. 그때 아빠가 울었는지 내가 울었는지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아빠는 눈물이 나도, 의연한 척, 끝내 참았을 거란 걸. 그게 부모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