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S. 바흐] 마르틴 게크
한줄평 : '바흐라는 음악'
나는 바흐를 '무반주 첼로 조곡'으로 처음 만났다. 결혼하고 신혼 깨소금이 아직 방 구석구석에 철철 흘러 넘칠 때, 나는 퇴근 길 버스에서 내려 모 음반점에 들렀다. 그곳에서 한 연주자가 자기 키만큼 큰 첼로를 옆에 두고 서 있는 음반을 봤다. 미샤 마이스키가 연주한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 이었다. 당시로는 거금인 만 원에 음반을 사들고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의 주류는 마그네틱 테이프였다. 오래 듣다 보면 테이프가 카세트에 감겨 카세트 플레이어까지 버려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기곤 하던 때였다. 자랑스레 cd를 보여주자 아내는 까무러지듯 놀랐다. 자기는 지금까지 리어카에서 파는 천 원짜리 카셋 테잎 말고는 사본 적이 없다고 했다. 아내는 지금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때의 놀라움, 충격이 꽤나 컸나 보다.
바흐는 내게 첫 cd로 그렇게 축복처럼 찾아왔다. 그의 음악에는 영적인 선율이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속세의 찌든 때가 음악으로 씻겨 나가는 치유의 경험을 하게 된다. 바흐의 무반주 바이올린, 무반주 첼로 모음곡은 그가 단선율의 천재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멜로디 악기가 독자적으로 멜로디와 반주의 기능까지 맡는 것, 그래서 하나의 완성품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또한 그에 못지않게 중요했다. 그 예로는 쾨텐에서 완성된 무반주 바이올린 소나타와 무반주 바이올린 모음곡 BWV 991~1006번, 무반주 첼로 소나타와 무반주 첼로 모음곡 BWV 1007~1012번 등이 있다.
"이 시기에 바흐는 다선율 혹은 단일선율로 만들어지는 모든 것을 다 시도해보려 했던 것처럼 보인다"라고 19세기 초에 전기 작가 포르켈(Forkel)은 쓰고 있다. (68쪽)
바흐는 어린 시절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9개월 사이에 모두 잃게 된다. 그는 고학으로 학업과 노동을 겸하는 힘든 시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그래서인지 그의 음악은 다층적으로 서민에게 다가간다. 절대적인 경건함을 보이지만, 그 속에 명랑함과 즐거움이 있다.
그 뒤 긴 세월 동안 바흐를 잊고 베토벤, 모짜르트, 헨델, 비발디에 이어 브루크너, 말러까지 숱한 작곡가와 연주자의 음반을 들으며 클래식 취미 생활을 했다. 그러나 어느날 오르간 음악에 흠뻑 빠지면서 다시 바흐를 만나게 된다. 바흐는 궁정 오르간 연주자였으며, 음악 교사였다. 그는 꾸준히 오르간을 연주했고, 청중 앞에서 두 시간씩 연주해보이고는 했다.
이 시기에, 대략 1722년경에 그는 함부르크로 여행을 했다. 그곳에서 시의회와 도시의 수많은 귀빈들 앞에서 아름다운 카타리나 교회의 오르간으로 2시간 이상을 연주하며 청중을 감탄케 하였다. 이 교회의 늙은 오르간 연주자 요한 아담 라인켄은 당시 거의 백 살이 다 되었는데, 특별히 만족스러워하면서 그의 연주를 들었다. (82)
바로 그의 위대한 오르간 음악 <토카타와 푸가> 음악을 듣고 그의 오르간 음악과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도입부의 놀라운 웅장함은 실로 중독성이 있어서 누구라도 그 음악을 듣고 나면 자신도 모르게 입으로 흥얼거리게 된다.
나는 그 뒤로 오르간 음악이란 음악은 다 찾아 다녔다. 헨델, 북스데후스, 파헬벨의 오르간 음악들을 찾아다녔고, 오르간이라고 적힌 음반은 다 사서 들어보았다. 그렇지만 역시 바흐의 토카타를 능가하는 첫 도입부 음악은 없었다.
"토가타의 시작처럼 그토록 강렬하게 시작하는 곡은 두 번 다시 없다. 그것은 번갯불처럼 내리치는 통일음, 오르간 전체에서 울려나오는 불협화음으로 길게 굴러가는 천둥소리, 북풍처럼 파도치는 세잇단음표 등으로 시작된다. 4소절을 통과하면서 반음 내린 7화음으로 미친 듯이 물결을 치다가 마침내 달이 힘찬 진지함으로 말을 시작하게 된다." -헤르만 켈러 (41쪽)
누군가는 바흐를 문학계의 셰익스피어에 견준다. 그는 언제나 노동자의 정신으로 작곡에 임했고, 창작에 최선을 다했다. 수많은 음악을 남겼지만 비슷한 음악은 없다. 늘 새로움을 찾아다니며 최고 위의 최선을 다한 음악가였다. 음악이란 '소리로 된 말'이다. 그는 음악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사상, 창조와 노동의 과정을 표현했다. 심장 속에 웅크리고 있는 열정의 덩어리를 끄집어 내 음표로 발화시켰다. 그는 사력을 다해 노력하는 천재였다.
하인리히 베셀러는 바이마르 시기 바흐의 선율적이고 감정적이며 표현이 풍부한 음악언어를 감상주의와 질풍노도의 '개척자'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이런 이유에서 무지카 포에티카의 전통을 포기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감정과 감각만 만족시키지 않고, 음악에 순간을 넘어서는 깊은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72)
바흐는 한 평생을 교회에서 교회음악을 하며 살았다. 그는 <마태 수난곡> <요한 수난곡>으로 기독교 음악의 정수를 뿌리내렸다. "경건한 음악에는 언제나 신께서 은총으로 함께하신다."는 경구를 자필로 악보에 적어 넣을 정도로 신앙심이 돈독했다.
<마태 수난곡>의 바흐가 음악적 절정기에 달한 마흔두 살 나이 때 작곡한 곡인데 비평가들은 이 2개 수난곡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정열과 냉정함, 드라마적 요소와 정신성의 대담한 결합은 그 뒤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고 평했다. 그만큼 두 수난곡의 음악적 성취도는 높았다.
많은 연주자들이 최고의 음악으로 꼽는 피아노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은 나에게 난해했다. 지나치게 단순하고 수학적이어서 음악적인 아름다움을 느끼지 못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앞다투어 이 음악을 연주하고 탄성을 내지른다. 나는 음악을 깊이 있게 공부한 사람도 아니고, 그저 듣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다보니 아직 위대한 바흐의 <평균율>을 잘 몰라본다. 그래서 열심히 들어본다. 귀에 익숙해지면 내게 친숙한 음악이 되겠거니 그렇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은 모르겠다. 너무 위대해서 나같은 범인은 그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리라.
옮긴이 안인희는 사람이 나이들수록 바흐에 빠져든다고 했다. 바흐의 음악을 '단순한 듯한 음율 속에 우주를 품은 깊이, 맑은 경건함 속에 스며든 슬픔, 때로 아픈 가슴을 더욱 후벼파는 아픔, 원천의 투명한 광채 같은 것'이라고 극찬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의 음악은 내 영혼을 울린다. 가슴으로 밀고 들어온다. 나는 떠밀리듯 뒷걸음치며 그의 음악을 온몸으로 받아낸다.
이 밤, 가슴 깊숙하게 밀고 들어오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 모음곡을 들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내 영혼은 바흐와 함께 비통해하며 눈을 감고 안식한다. 슬픔 속에 깃든 경건함이 나를 놀랍도록 평온하게 이끈다. 바흐는 그런 음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