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희망의 존엄을 위해 걸어가는 길-오늘이 내일이면

by 봄부신 날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남유하

한줄평 : 오늘이 내일이기를 바라는, 그 희망의 존엄을 위해 걸어가는 길



2_hbdUd018svc1l24tlnz13ktn_us9xsu.jpg?type=e1920_std






너무 슬프거나 너무 괴로울 때, 얼른 이 시간이 지나가 내일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때로는 그냥 10년이 훌렁 지나가버려 지금보다 더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었다. 가끔은 지금의 이 모든 시간이 다 지나가고, 나는 더 늙은 사람, 곧 죽을 사람이 되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런데,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나의 그런 생각들이 얼마나 자기기만적이고, 무책임하며, 안일한 상상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런 생각은 죽기보다 더한 절박함이 아닐 때에는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그 한 마디가 주는 말의 힘은 너무나 크고 깊었다.

"오늘이 내일이면 좋겠다."
아침에 눈을 뜬 엄마가 말했다. 하루라도 빨리 고통을 끝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단 한 문장으로. (115)

이 말은 엄마가 죽기로 한 그 날 아침에 엄마가 뱉은 말이다. 오늘이 내일이었다면 엄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이 괴로운 심정, 이 이중적인 감정, 가슴 아파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마주 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고통이 죽음보다 더한 고통으로 시시각각 삶을 조여올 때,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죽음을 간절히 바라게 되고, 죽음을 더 가깝게 느끼며, 삶에 대한 애착을 송두리째 끊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속시원히, 안달복달 하지 않고 이 세상에서의 삶을 더는 미련 갖지 않고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으리라.

이 책은, 암 투병을 하는 저자의 어머니가 존엄사를 선택하기 위해 스위스의 한 재단에 가입 신청을 하고 스위스로 가서 조력사망을 하기까지의 일상을 그린 에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미국과 스위스 등에서는 합법적으로 한 인간의 죽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존중해준다.

현재 미국의 몇몇 주와 네덜란드, 벨기에, 스위스, 룩셈부르크, 콜롬비아, 캐나다 등의 국가에서 존엄사를 허용한다. 각각의 국가마다 존엄사를 허용하는 요건도 다르고 용어도 차이가 있지만 추구하는 목표는 같다. 환자의 자기 결정권을, 존엄하게 삶을 마무리하고자 하는 권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232)

물론 내가 이런 취지에 100퍼센트 동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 삶의 고난이 어떠한지를 능히 짐작하지 못한다. 그건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제대로 알 수 없다. 아무리 딸이고, 남편이고 하더라도 본인만이 견뎌내야 하는 그 아픔의 깊이를 우리는 함부로 말할 수 없다.

딸인 저자는 SF 작품, 청소년 작품을 창작하는 작가인데, 이번에 어머니의 죽음을 스위스로 가서 함께 맞이하도록 도우면서 그 아픔을 나누는 마음으로, 또 한국에서 자기결정권이 더 빨리 합법화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책을 썼다. 엄마와의 죽음을 다시 복기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이었을까를 생각하면, 그녀의 주장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는 엄마가 자살을 꿈꾸리라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자기 삶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암이 사방으로 전이되고 암이 뼈를 갉아먹기 시작하면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나는 최근에 요로결석으로 119에 실려 응급실로 가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3대 고통 중 하나라는 요로결석. 나는 통증이 밀려오자 즉각적으로 참을 수 없는 고통임을 깨달았고, 눈짓으로 딸에게 119를 불러달라고 했다. 요로결석의 통증을 어디 항암투병에 비할 수 있으랴. 그 고통이 어떠한지는 여러 경로로 들어서 익히 알고 있다. 그래서 저자와 저자의 어머니가 내린 결정을 나는 존중한다.

우리는 이런 대화를 오늘 점심에는 뭘 먹을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나눴다. 나에게는 엄마가 정말로 실행하지 않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엄마는 삶을 무척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다만 극심한 고통 앞에 무력해지는 순간이 오면, 죽음을 상상해서라도 거기서 벗어나야 했을 것이다.

어느 날, 엄마의 화장대 서랍에서 압박 붕대를 발견했다. 쥐가 나는 다리에 감기 위한 용도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은 양이었다. 네 확신이 틀렸을 수도 있어. 직감이 경고했다. (43)

스위스의 디그니타스 재단은 오히려 최종 승인 결정을 받고 나면 삶의 질이 좋아질 수 있다고 말한다. 오히려 남은 삶을 견뎌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 말도 수긍이 간다. 버킷리스트도 해보고, 가족과 남은 시간을 더 뜻깊고 알차게 보낼 수 있으리라.

7월3일 밤 11시50분, 디그니타스로부터 그린라이트를 받았다. (...) 의사가 엄마의 조력사망에 동의했으므로 두 번의 면담 후에 처방전을 쓸 수 있다. 디그니타스는 그 처방전에 따라 펜토바르비탈나트륨을 얻을 수 있다. 환자는 원하는 날에 디그니타스에서 운영하는 블루하우스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자신들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그린라이트는 환자의 상태를 개선시킬 수 있으며, 삶을 더욱 견딜 만한 것으로, 심지어 어느 정도 즐길 수 있게 도와준다.

퇴근길 버스 안에서 이 책을 읽었는데, 눈물이 흘러 계속 읽어낼 수가 없었다. 몇 번을 책을 덮고 한참 동안 감정을 삭혀야 했다. 알고 있지만, 떠나 보내야 하는 그 마음, 알고 있지만 떠나야 하는 그 마음을, 책을 읽는 우리는 모른다. 그저 짐작만 할 뿐이다. 그럼에도 눈물이 흐른다. 슬프다. 죽음은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우리를 자연 앞에서 순응하게 하고, 겸손하게 한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생명의 소중함을 깨닫고, 다른 피조물과 동일한 생명체임을 깨닫는다. 누구나 죽는다는 걸, 우리는 늘 잊고 산다. 이 부분을 읽을 때 나는 감히 더 앞으로 나가지 못했다.

떨리는 목소리. 아빠의 검버섯 위로 구불구불 흐르는 눈물 줄기. 아빠는 엄마의 고통을 가장 적나라하게 목격했다. 자다가도 엄마가 아파하면 잠에 취한 채 다리를 주물러주었다. 그에 비하면 나는 외부인이었다. 엄마가 아프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었지만 얼마나 괴롭고 힘든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랑 만나면 차도 마시고 이야기도 더 하고 싶었다. 그때마다 아빠가 왜 그리 심통을 부리며 빨리 집에 가자고 했는지, 나는 엄마가 떠난 뒤에야 알게 되었다. 엄마는 나를 만나는 날에는 독한 진통제를 두 개나 먹고 안 아픈 척 했다는 것을, 몸에 무리가 가서 밤에는 몇 배나 힘들어했다는 것을. (96)

암에 걸렸다고, 아프다고 누구나, 언제나 죽음을 선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견뎌낼 수 있을 만큼 견뎌내야 하고, 이겨낼 수 있다면 이겨내야 하고, 살아낼 수 있다면 살아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요 소명이다. 그것을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를 따지거나 계산하는 것은 이제 무의미하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 앞에서 엄격한 조건 하에서 자기결정권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 저자가 엄마의 죽음을 바라보면서 느끼고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그것이었다. 무분별한 죽음의 접근이 아니라, 엄격한 조건 하에서 존엄하게 자기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

폭풍이 몰아치는 밤이었다. 창문이 덜컥거릴 정도로 비바람이 거셌다. 엄마가 내일이면 사라진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엄마를 보내고 싶지 않아. 그래도 받아들여야 해. 엄마가 아프지 않는 곳으로 가는 거니까.
엄마와의 마지막 밤. 나는 눈물을 먹는 법을 배웠다. (140)

내가 이 책을 읽었다고 해서 저자의 의견에 100퍼센트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삶이란, 죽음이란, 고통이란, 가족이란, 과연 무엇인가. 그 존재의 의미뿐만 아니라, 존재의 존재. 그 의미를 생각하게 했다.

모든 것은 바뀐다. 알면서도 바뀌지 않았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294)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당신의 인생에도 푸구이가 있다면, 위화의 <인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