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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부신 날 Jul 04. 2023

뒤집어쓴 로빈슨 크루소. 방드르디 vs 로빈슨

독서후기

(작은 리뷰) 흑인 금요일 '방드르디' 너는 자유다.


나는 표류문학을 참 좋아한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

인생은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것.

지금 내 인생도 내가 계획한 대로 흘러온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러니, 우리 인생은 그 자체가 표류하는 문학이다.

단지, 어떻게 표류할 것인가, 그것이 인생의 질을 결정한다.


그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은 "노인과 바다"이고,

가장 좋아하는 영화는 "김씨 표류기"다.


(이 영화에 대해서 할 말은 많지만 여기서는 이쯤에서 줄인다. 호옥시  다음에 기회가 있다면)


배는 난파를 당하고,

드넓은 바다를 긴긴 시간 표류하고,

어쩌다 닿은 내륙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도이고,

그런 곳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마지막 남은 인내와

자신의 가장 밑바닥 자아를 드러내보이는

철저한 자기와의 싸움이 될 터이다.


저자 미셸 투르니에,는 프랑스 현대 문학의 거장이라고 소개되고 있는데, 나는 그가 쓴 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외에는 아쉽게도 읽어본 작품이 없다.


이 책은 놀랍게도 우리에게 성경 다음으로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로 소개되는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재정의한 작품이다.




이미 나와있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작품을, 동일한 주인공 이름과 동일한 상황으로 설정하여 새롭게 쓴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것을 작가의 새 작품으로 사회가 인정하고 받아들여줌은 물론, 그 문학성을 높이 인정하여 출간 즉시 인기를 끌고 작가의 반열에 올라섰다는 것도 놀라웠다.


알려지기로, 책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로빈슨 크루소]에서는 노예 또는 하인처럼 취급당했던 '프라이데이'가 이 책에서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했다. 방드르디는 프라이데이의 프랑스 판 이름이다.


민음사 판으로 볼 때, 책은 300여쪽 분량이다. 총 12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무리 읽어도 로빈슨 크루소의 관점만 나오고 방드르디는 나타나지 않는다.


음, 왠지 속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방드르디 책은 이번에 두 번째 읽게 된 것인데, 이렇게 새롭게 다가온다는 점에서, 모든 책은 두 번 이상 읽어야겠다는 강한 생각이 들었다. 영화도 두 번 세 번 볼 때, 안 보이는 것들이 보이지 않던가. 책도 마찬가지다. 두 번 세 번 읽게 되면 안 보이던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이제나 저제나 방드르디가 나타나길 기다리며 겨우겨우 읽어나갈 때, 책의 반이 겨우 지났을 때, 7장 177쪽에 이르러서야 아라우칸 족 사람이라는 표현으로 방드르디가 등장한다.


나는 그때부터 서술 관점이 방드르디에게로 넘어갈 줄 알았다. 그러나 역시 모든 서술의 주인장은 계속해서 제국주의, 권위주의, 갑중의 갑, 로빈슨이었다. 그는 마지막 끝부분까지 자신의 항해일지를 놓지 않았다. 이야기는 끝까지  로빈슨 크루소의 관점으로 서술된다.


그렇다면, 방드르디는 과연 이 책에서, 기존 책[ 로빈슨 크루소]와 어떤 차별점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 후 방드르디는 몸과 넋이 다 백인의 소유다. 그의 주인이 그에게 시키는 것이면 무엇이나 선이요 그가 금지하는 것은 무엇이나 악이다. 까다롭고도 의미 없는 조직이 기능을 발휘하도록 밤낮 할 것 없이 일을 하는 것은 선이다. 주인이 정해 준 몫보다 더 많이 먹는 것은 악이다.


주인이 장군일 때 병졸이 되고, 주인이 기도할 때 성가대 소년이 되고, 그가 집을 지을 때 석공이 되며, 그가 땅을 가꿀 때 농장 심부름꾼이 되고, 그가 가축을 돌볼 때 목동이 되고, 그가 사냥을 할 때 몰이꾼이 되며, 그가 물 위로 나갈 때 노를 젓고, 그가 앓을 때 의원이 되고, 그를 위하여 부채질을 하고 파리를 쫓는 것은 선이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 183쪽)


여기까지는 로빈슨 크루소가 섬에서 만든 자신만의 성채의 하인이요 노예로서 기능을 충실히 한다. 로빈슨 크루소는 대니얼 디포의 세계에서나 미셸 투르니에의 세계에서나 같았다. 그는 무인도에서조차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고 자신이 왕이 되고 총독이 되고 갑 중의 갑이 되었다.


서구인, 백인은  우월하고 당연히 미개한 유색인을 가르치고 때리고 소유할 수 있다는 신념과 가치관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은 원작 [로빈슨 크루소]는 사실 그런 점 때문에 완독해내기가 너무 힘든 책이다. 당시에는 그런 가치관이 지극히 일상적이어서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지만, 우리는 특히 약자 입장이고, 서구의 주권 침탈을 몸소 겪은 민족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방드르디.에서도 초반부는크루소의 그런 가치관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원작보다는 조금 순화되어 읽어나기가 조금 낫다.


로빈슨은 섬의 군림자 총독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신이 되려 했다. 자신이 창조하지도 않은, 같은 사람이지먼, 단지 자신이 그의 생명을 구해주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신은 백인이요 방드르디는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는 그를 피조물처럼 대하려고 했다. 그가 쓴 항해일지를 읽어보자.


"분명 그는 내가 손끝만 까딱해도, 눈만 껌벅해도 복종하는데, 내가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일이다." (188쪽)


하지만  이야기는 8장으로 넘어가면서 단숨에 극적인 변화에 직면한다. 방드르디의 재정의,라고 할까..


환상소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잠시 로빈슨이 사라진다. 7장 말미에서 로빈슨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숲으로 간다.


"그는 조용히 일어나서 서로 껴안고 있는 방드르디와 텐(개)의 몸을 타 넘어 고무나무와 백단나무가 우거진 숲을 향하여 걸어갔다." (192쪽)



그리고 8장에서 로빈슨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방드르디는 자신만의 자유를 만끽하기 시작한다. 로빈슨이 끔찍하게 아끼며 방드르디에게 급료로 주던 돈이 든 궤짝을 던져 버리고, 동굴 안에 숨겨둔 옷가지들을 꺼내어 로빈슨이 공들여 심고 가꾸어놓은 해변가 선인장에 입힌다. 무언의 반란이다.


환성소설인가 했는데 로빈슨은 다시 돌아온다. 로빈슨이 아끼던 담배를 동굴 속에서 피우던 방드르디는 놀라서 버린다고 동굴 깊숙한 곳으로 던졌는대, 그곳은 난파당한 배에서 혹시 모를 위헝, 사냥을 위해 가져다놓은 엄청낸 폭약이 숨겨져 있었다. 커다란  폭발소리와 함께 그들의 거처 동굴은 완전히 파괴되고 만다. 로빈슨은 쓰러지고  눈을 떴을 때 이제 방드르디의 손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신세가 역전된 것이다. 총독에서 평민으로. 아니 오히려 방드리디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이제 그는 방드르디와 단둘이서만 고독하고 자유롭고 공포에 질린 채 표류하고 있었다. 나무가 어둠 속에서  쓰러지는 순간 그를 구하기 위하여 그의 손을 잡아주었던 저 검은 손을 이제는 놓을 수가 없었다." (235쪽)


이 이야기가 주인 로빈슨과 하인 방드르디의 싸움이라고 치면,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은 방드르디의 손을 들어줄 것이다. 애초에 소설을 집필한 목적이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방드르디는 로빈슨이 가장 아끼는 염소를 죽여 가죽을 벗기고 숲에 들어가 악기처럼 걸어놓는다. 로빈슨은 무력하게 지켜보기만 한다. 염소는 바람이 불면 괴상한 소리를 내며 울부짖는다. 마치 방드르디의 자유를 향한 몸부림같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관점에서 이 이야기를 읽는다. 결국 로빈슨도 승자라는 것이다. 방드르디에 의한 것이긴 했지만, 로빈슨도 진정한 자유, 자신을 옥죄고 있던 집착, 조직, 권위, 우월감 같은 것들을 비로소 던져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커다란 배가 기적처럼 나타나고, 문명사회로 나갈 기회가 생겼음에도 불구하고, 로빈슨은 오히려 섬에 스스로 남고, 방드르디는 쪽배를 타고 문명사회의 커다란 배에 올라탄다. 나는 오히려 그 지점에서 방드르디에게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는 과연 문명사회에서 잘 살아갈 수 있을까.


그리고 로빈슨은 큰 배 화이트버드 호에서, 써먹을 데라고는 하나도 없다며 구박만 받던 소년을 선물처럼 안게 된다. 소년은 로빈슨의 따뜻한 눈빛을 보고 탈출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방드르디와 소년은 그렇게 서로 자리바꿈을 한다.



이제 로빈슨은 자기 왕국이 없어지고 진정한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그 소년을 방드르디처럼 대하진 않을 것이다. 로빈슨은 소년에게 목요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로빈슨은 방드르디 소설에서도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정해주는 못된 권위주의는 버리지 못했다.)


미셸 프루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보고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적었다면, 나는 그걸 이어서 [자안 넬자페브] 소설을 쓰고 싶다. 로빈슨은 늙고 병들 것이고, 소년은 로빈슨이 섬에서 산 28년을 이어 살아갈 것이다. 19세에 섬에 온 로빈슨은 어느새 50이 다 되었다. 그 당시로는 평균 수명이 다 된 나이일 것이다. 소년은 앞으로 그 섬에서 30년은 더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녀석에서, 로빈슨이 붙여준 목요일이라는 '죄디'가 아니라, 자신의 진짜 이름 '자안 넬자페브'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 있으나마나 한 사람은 없다.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람도 없다.

당신의 심부름이나 하라고 하인으로 태어난 사람도 없다.


신이 허락해준 삶에는 그 목적과 소명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발견하며, 이루며 살아간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더 존귀하고, 소중하고, 나와 연결된 타인에게 중요한 것이다.

나와 너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된 관계에 있다.

지구는 둥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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