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라벨: Part 2-1. 팬데믹 이전

시간의 설계

by 스털링

팬데믹 이전 호주에서 짧게 몇 개월, 싱가포르에서 몇 년 근무했다. 샐러리 맨이라면 누구나 출퇴근을 하고 출장을 위해 집을 떠나야 할 때가 있다. 그럼에도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은 늘 일과 삶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었다.



가족을 위해 회사를 옮긴다

싱가포르 오피스로 옮기기 전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직원에게서 메일을 받은 적이 있다. 메일의 내용은 이랬다.

“한 은행의 인프라 전환 프로젝트를 하고 있습니다. 6개월 넘게 가족과 떨어져 지내고 있는데, 사정상 더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싱가포르로 온다고 들었는데, 남은 몇 달간 제 포지션을 맡아 주실 수 있을까요?”


프로젝트 위치를 확인해 보니 인도양에 있는 모리셔스라는 작은 섬이었다. 싱가포르에서 인력이 파견되는 경우는 흔치 않은 지역이었다. 나는 이미 프로젝트가 정해져서 어렵고, 대신할 만한 사람을 찾아보겠다고 회신했다. 몇몇 동료를 소개해 주었지만, 몇 달 후 프로젝트에서 돌아와 보니 그는 이미 퇴사한 상태였다. 결국 대체자를 찾지 못했다고 다른 동료가 전해 주었다.


당시 나는 의아했다.

“가족 때문에 회사를 그만뒀다고? 프로젝트는 언젠가는 끝날 텐데 왜?”


그런데, 몇 달 뒤 또 다른 동료가 같은 이유로 회사를 떠났다. 그때 깨달았다. 그들은 가족이 회사를 떠날지 남을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이었다.


한국에서는 흔치 않은 풍경이다.
우리는 여전히 ‘가족을 위해 회사를 그만둔다’는 선택이 낯설고,
오히려 가족과의 시간을 줄이면서까지 직장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회사의 노력과 한계

회사는 매년 직원 만족도 조사를 실시했고, 늘 가장 낮은 점수를 차지하는 항목 중의 하나가 ‘워라벨’이었다. 업무가 많고, 출장이 잦고 근무시간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삶과 일의 균형을 맞추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회사는 프로젝트 사이에 충분한 휴가를 보장하거나, 가족과의 외식 비용을 지원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만족도를 끌어올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급여나 복지를 조금 줄이더라도 워라벨이 좋은 곳으로 옮길 것”이라는 응답도 적지 않았다.



한국과 다른 인식

한국에서도 워라벨은 낮은 점수를 보이지만, 이유는 약간 다르다. 야근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아침에 나와 밤늦게 퇴근할 뿐만 아니라 업 특성상 주말도 반납해야 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회사를 그만 두는 경우는 드물다.

오히려 “돈을 버는 것이 곧 가족을 위한 일”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아이들을 좋은 학교에 보내고, 가족들의 더 나은 생활을 위해서는 시간이 아니라 돈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래서 일 때문에 가족과의 시간이 줄어드는 것 자체가 문제로 인식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을 좋은 시선으로 봐 주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떤 나라에서는 이 이슈를 무겁게 받아 들이고, 가족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제도화하고 있었다.



시간을 설계하는 사람들

팬데믹 이전 호주에서 프로젝트를 할 때 가장 당황스러웠던 것은 출퇴근 시간이 제각각이라는 점이었다. 수년간 9시 출근이 몸에 배어 있던 나로서는 혼란스러웠다. 동료에게 물었다.


“자신의 일정에 맞춰 유연하게 하면 됩니다. 회의에만 늦지 않으면 돼요.”


그들은 보통 10시쯤 출근했고, 회의는 오전에 집중됐다. 퇴근은 오후 4~5시 사이였고, 5시면 사무실이 거의 비어 있었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 일을 하지?”


그런데 다음 날 회의에서 그들은 산출물을 착착 내놓았다. 그들의 패턴은 달랐다. 아이들을 돌보고 저녁을 함께 먹고, 밤 9시 이후 ‘2라운드’에 들어가는 식이었다. 정해진 시간까지 결과물만 내면 어디에서 언제 일하든 상관없었다.


흥미로운 건 고객도 마찬가지였다. 프로젝트는 늘 고객사에서 해야 하는 한국과 달리, 호주에서는 대부분 우리 사무실에서 진행됐다. 필요한 보고나 회의만 약속된 시간에 고객사에서 진행했다. 중요한 건 ‘사람이 현장에 있는가’가 아니라 ‘결과물이 제때 나오는가’였다.


회식은 분기에 한번 정도 프로젝트 팀별로 있었다. 재밌는 건 회식시간이 5시부터 8시까지 정해져 있었다. 그 시간대에 자유롭게 참석하고 떠날수 있었고, 미리 일정이 공유되니 가족과 시간 조율도 가능했다. 계획만 세우면 일과 생활 모두 균형 있게 이어갈 수 있었다.



아버지 학교 가는 날

하루는 함께 일하던 동료가 출근을 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다른 동료에게 물었더니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 가는 날이라고 했다. ‘아버지 학교 가는 날!’


매월 하루 아버지가 자녀가 다니는 학교에 가는 날이 정해져 있었다. 눈치 볼 필요없이 사전에 팀리드에게 알리고, 일정을 조정하면 그만이었다. 만약 그 시간에 보고가 있거나 하면 조정해 주거나 다른 사람이 대신해 주었다. 학교가는 게 먼저였다. 회사의 타임시트 시스템에 그 시간을 입력할 수 있도록 코드도 부여가 되어 있었다. 아이를 키우고 가족을 돌보는 시간을 회사가 보장해 주고 있고, 실제 그렇게 흘러갔다.



다른 세상 같았던 경험

호주에서 돌아왔을 때 나의 시선은 많이 달라져 있었고, 우리의 일하는 방식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하루 3시간을 소비하며 출퇴근했고, 새벽별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문제로 여기지 않았다. 마치 딴세상에서 돌아온 기분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미 그 차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팬데믹을 거치며 그 인식의 차이는 더 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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