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파심일지도 모르지만 써보는 단상
약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월드컵이 열린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국가대표팀 선수들의 잇따른 부상과 그에 따른 전력 약화, 극도로 열악한 조편성 등으로 인해 일찍이 기대감을 접은 탓도 컸지만 국내외적으로 북미정상회담 등 굵직굵직한 외교적 현안들이 있어 어느새 내 머리 속에서는 월드컵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고 없었다.
월드컵에 대한 언론의 푸시는 대단한 듯싶다. 이번 월드컵만큼은 영영 내 관심에서 멀어져 있을 줄 알았는데 월드컵 개막 전후로, 월드컵에 대한 재미있는 언론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고 개막 후 펼쳐진 흥미로운 경기들은 다시금 나로 하여금 월드컵에 눈길을 돌리게 만들었다. 그리고 어쩌겠는가, 그래도 '우리' 팀인 것을. 3시간 걸려 배달받은 동네 치킨 뜯으며 열심히 스웨덴 전, 멕시코 전을 감상하였다. 결과는 이래저래 아쉬운 패배.
패배 사실과 선수들, 대표팀, 감독, 협회 등을 둘러싼 온갖 무성한 말들이 오간다. 왜 패배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성토는 물론, 자질 논란, 영원한 우리의 친구 '경우의 수' 등등 멕시코전 패배 이후, 주요 포털 사이트 뉴스나 커뮤니티 등을 둘러보니 월드컵과 국가대표팀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에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패배 후 떨어진 선수들의 자신감 회복 등을 위해서는 대표팀에 '멘탈 코치'를 따로 두어야 한다는 주장들이었다.
http://www.nocutnews.co.kr/news/4990152
http://joynews.inews24.com/php/news_view.php?g_menu=702210&g_serial=1103755&rrf=nv
스웨덴, 멕시코에는 이미 멘탈 코치가 있어 선수들이 상당한 정신적 도움을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패배 후 찾아오는 불편한 감정과 위축 등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 '국가' 대표로서의 자부심, 한 편으로는 '국가' 대표이기에 겪을 수밖에 없는 부담감을 어떻게 안고 가야 하는가. 선수 - 코치진 - 감독 - 협회 - 국민 간 관계 갈등과 오해는 어떻게 풀어야 하는가 등등. 가만히 생각해보니 만약 국가대표팀에 전속 멘탈 코치가 소속되어 있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참 많을 듯싶다. 그래서 국가대표팀에 멘탈 코치를 들이자는 주장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무척 환영하는 바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멘탈 코치를 단기 처방전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아 그에 대한 약간의 우려가 있다. 그러나 상담 한 번으로, 심리학자들의 전문적인 자문/개입 한 번으로 극적인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왜 그럴까? 누군가의 마음을 깊숙이 들여다보고, 실질적인 변화까지 이끌어내는 데에는 그에 대응하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본래 상담이란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과정이다.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에게도 한 명의 내담자를 상대하는 것에는 길게 몇 달 이상의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대개 오늘날의 상담자들도 수회기에 걸친 상담을 진행하고 있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상담자들은, 상담을 받으러 온 내담자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 이전, 이른바 라포(rapport)를 형성하기 위한 시간을 둔다. 상담자-내담자 간 라포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상호 간 신뢰, 공감, 이해, 감정 교류 등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상태가 만들어졌음을 의미하는데 그것이 바탕이 되었을 때, 상담자의 개입도 원활해지고 내담자의 변화와 성장 또한 긍정적으로 기대해볼 수 있다.
노파심일 것이라 생각하지만 멘탈 코치가 투입됐는데, 왜 효과가 없냐고 성토하는 목소리가 '일찍부터' 들릴 것이 염려스럽다. 스웨덴 국가대표팀의 경우, 무려 8년 가까이 함께 해 온 멘탈 코치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8년이라는 숫자 자체가 중요하다기보다는, 선수들과 멘탈 코치가 반복적인 만남과 교류를 통해 라포(rapport)를 형성하기 위한 충분한 시간을 두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좋을 것이다. 따라서 멘탈 코치를 들이려거든 우리 또한 선수, 감독, 관계자들이 멘탈 코치와 '마음을 터놓고' 대화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들을 기다려주어야 함이 옳다고 본다.
더군다나 국가대표팀의 경우, 클럽팀과는 달리 항상 함께 하는 것이 아니며 평가전이나 올림픽, 월드컵 등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 일시적으로 소집되었다가 해체를 반복해야 하는 운명이다. 그러므로 멘탈 코치가 선수들과 깊게 사귀는 데에는 아무래도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으리라. 부디 이번 월드컵을 반성의 계기로 삼고 4년, 8년 뒤 더 나은 미래를 바라보고자 한다면, 멘탈 코치 역시 일찍부터 들이는 한편, 그에게 충분한 시간과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한 판 한 판의 무게감이 큰 월드컵 행사에서는 선수들의 정신적인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멀리 보고, 멘탈 코치를 키우자. 분명 그가 '밥값'을 해줄 날이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