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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보 강연자의 잘못된 습관 한 가지

OOO에 너무 의존한다

내가 심리학 강연자로 활동한 지 거의 10년이 다 되어 간다. 말이 10년이지, 첫 1~2년은 강연자라는 자각이 없었다. 어쩌다 강연 의뢰가 들어오면 가서 용돈을 벌어오는, 그런 정도였기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하지만 생각보다 강연 활동이 재미있었고, 내 머릿속에는 강연에 써먹을 소재가 넘쳤다. 그리고 주변 피셜이지만 내가 강연에 나름 소질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마침 대학원 졸업 이후 뭐 하며 지낼지 딱히 정해둔 것도 없었기 때문에, 나는 야심 차게 심리학 강연자로 활동해 보기로 했다.





하지만 인생은 실전이야



주로 학교에서나 발표해 봤지, 바깥에서 일반 성인을 만나고, 그리고 심리학에 대해 전혀 베이스가 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한다는 것, 무엇보다 강연으로 밥 벌어먹고산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실전인 걸 모르고, 학교에서 하던 대로 강연을 준비했다가 기껏 찾아와 주셨던 청중들한테 시원하게 얻어맞고 난 뒤, 나는 어느새 여유라는 것을 잃어버리기 시작했다.


PPT는 그저 거들 뿐 → PPT 못 잃어 나는 못잃어ㅠㅠ


초보 강사로서 나는 PPT에 크게 의존하기 시작했다. 현장 분위기와 나의 위트에 의존하기에는 난 경험이 부족했다. 안내사항이든, 정보전달이든, 유머이든, 마무리인사든 난 모든 것들을 PPT 안에 넣었다. 그리고 실전에서는 청중들과 함께 PPT를 보며 강연을 진행하곤 했다. 그때는 그걸로 된 줄 알았다. 적어도 내가 할 말이 PPT와 대본 안에 다 있으니까,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기본 이상은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차에, 대학원 때 날 지도해 주시던 교수님의 도움을 받아 잠시 학과 사무실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고 나는 교직원 자격으로 대학에서 실시하는 각종 직무교육에 참여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교육들 중에는 발표하는 법에 대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



발표하실 때는 가급적 PPT를 보시면 안 됩니다. 
강사는 PPT를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나 몸은 청중을 향해 있어야 하지요.



그때 강사님이 하신 말씀은 이랬다. 난 그 말을 듣고 뜨끔했다. 언제까지나 PPT에만 의존할 수 없는 거였는데, 난 PPT를 너무 믿었고, 한 시간 반 강연에도 100쪽이 넘는 PPT가 당연히 있어야 했고, 그러다 보니 청중을 볼 기회도, 소통을 이어갈 기회도, 현장 분위기에 맞출 기회도 없었다.



내 목적: PPT에 대한 의존도 감소

난 개인적으로 PPT화면 없이, 순수한 말빨로 승부하는 강사들이 가장 부럽다. 하나같이 탄탄한 내공을 갖고 있으며 언제 어떤 상황이어도, 관객의 어떤 반응이 있어도 그에 맞춰갈 수 있다는 자부심과 여유를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PPT에 과도하게 의존하다 보니 나름대로 힘든 점도 참 많았다. 무엇보다 머릿속에 넘치는 아이디어를 즉시 무대에 올리는 작업이 어렵게 느껴졌다. 강의 구상은 머릿속에서 금방 끝나지만 그걸 그럴싸한 PPT 화면으로 옮기고, 나름대로 디자인도 고민하고 하다 보면 굉장히 품이 많이 들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실 초보 강사 시절에는 청중의 반응을 이끌어내는 기술이 많이 부족했다. 근데 그게 당연할 수밖에 없었던 게, 나부터가 청중을 안 보고 PPT 화면에만 거의 눈길을 주고 있었는데 어떻게 정상적으로 대화가 이뤄질 수 있었을까. 결과적으로 나는 강연을 즐기지 못했다. 청중들의, 예상치 못했던 반응을 즐기며 이어가야 재밌는 건데, 그래야 똑같은 교안의 자존감 강연을 100번 하더라도 다 다른 소통이 나올 수 있었던 건데 PPT만 따라가고 있으니, 나는 강연할 때마다 판본을 그대로 찍어내는 듯한 기분만 받았다.


그래서 이제는 좀 힘을 빼기로 했다.
PPT 분량을 좀 줄이고, 청중을 신뢰하기로 했다. 


나는 자격증 강사가 아니다. 입시 강사도 아니다. 나름대로 '대중 강연'을 표방하고 있다. 그래서 한정된 시간 안에 모든 정보들을 다 욱여넣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PPT에 대한 부담감이 조금 덜어지는 느낌이다. 대중 강연을 지향한다면, 이전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정보전달보다는 '스토리'와 '맥락'의 힘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PPT보다는, 직접 청중을 마주 보는 내 진실한 눈과 목소리를 통해 더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해서 최근 론칭했던 내 강연 아이템이 바로 <공간의 심리학: 나를 바꾸는 심리 기술>이었는데, 다행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예전에 PPT에 온갖 정보들을 욱여넣던 내 강박을 좀 버렸는데, 그렇게 버리고 나니까 비로소 그 빈 공간에 청중과 나 사이의 이야기가 새로 채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강사는 웃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 강연을 통해, 청중 덕분에 나는 즐겁게 웃으며 강연을 했다.


앞으로는 힘을 뺀 채,

좀 더 다양한 주제로 가볍게 강연을 열어보려 한다.

심리학 강연자로서, 여러분과 조잘조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잔뜩 무게 잡기보다는, 바로 옆에서 함께 호흡하는 그런 모습을 그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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