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의 시작

by 노용호

#1월 1일, 역삼역 인근 HSH빌딩 앞


"누나, 이건 아닌 거 같아. 나중에 연락... 아니다, 앞으론 연락할 일은 없을 거야."


시준은 조금씩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는 듯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어 딱딱 끊어가며 말을 뱉었다. 애써 웃음 짓고 있었지만 끝으로 갈수록 분노를 주체할 수 없다는 듯 말끝이 조금씩 떨렸다. 시준의 이런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는 미영이 물었다.


"갑자기 왜 그래?"


시준은 당연한 것을 묻는 미영의 말에 놀랐다.


"몰라서 묻는 거야?"


"당연하지 말을 안 했잖아. 네가 왜 이러는지. 내가 어떻게 알겠어?"


"나 여기 왜 데려온 건데?"


"좋은 얘기 들어보라고. 너도 좋다며 그래서 따라온 거 아냐?"


"좋은 얘기...? 이거 다단계잖아."


미영은 '다단계'라는 단어가 거슬렸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에게도 무수히 들어온 그 단어였다. 그 단어를 시준의 입에서 까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다단계가 아니고 네트워크마케팅!'이라고 소리쳐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단계'라는 단어에 격한 반응을 보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이 일을 하는 사람이 필히 가져야 할 소양이었다. 당황한 기색을 내지 않고 미영은 회유의 말투로 말을 이어갔다.


"다단계? 그런 거 아니야. 들어보면 알겠지만..."


"더 들어볼 것도 없어. 다단계 아니면 사기겠지."

시준은 더 들어볼 것도 없다는 듯 미영의 말을 끊었다. 사실 미영의 말을 끝까지 들을 자신이 없었다. 더 듣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미영의 회유에 넘어가게 될지도 몰랐다. 그 불안한 마음에 더 독하게 말을 내뱉었다.


" 아니, 왜 끝까지 들어보지도 않고 결론을 그렇게 내? 네가 그렇게 결론 내버리면 내가 뭐가 돼? 내가 지금 얼마나 민망할지 생각 안 해봤어?"


"뭘 더 들어봐야 하는데?"


"너, 나 못 믿어? 내가 너 아무 데나 데려올 그런 사람으로 밖에 생각 안 했어? 너한테는 내가 고작 그런 사람이었니?"


"이제 보니 그런 거 같아. 내가 사람을 잘 못 본 거 같아."


미영은 더 이상 참지 않기로 했다. 시준의 단호함은 회유로 돌아올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일을 시작하고 적잖은 사람들을 상대하고 생긴 일종의 감이었다. 그렇다면 더 이상 듣고만 있을 필요가 없었다.


"나야말로 정말 실망이다. 네가 아직 어려서 그래. 이거 나쁠 거 하나 없는 거야. 세상 어딜 가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달린 거지. 다단계든 뭐든 그게 뭐가 문제야? 너 그런 사고방식이면 세상 살기 힘들어. 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게, 돈을 번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나 하는 거야? 어떻게 서른 다 되어가지고 하는 생각이 아직도 애니? 맨날 말로만 군대를 어디를 나왔네 군대에서 뭘 했네 하면서 정작 이렇게까지 사회생활을 못해서 어쩔 거야? 정말 너도 걱정이다. 뭐? 연락할 일이 없을 거 같다고? 됐어! 끝내. 아, 분명히 해둬. 내가 끝내는 거야. 네가 너무 어려서 내가 먼저 못 만나 주겠으니까 꺼져."


말을 끝낸 미영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뒤돌아 자리를 피했다. 미영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되돌려주려 노력했다. 그동안 자신의 일을 하찮게 말하던 사람들에게 언젠가 돌려줄 날을 꼽으며 일기장에 빼곡히 적어두었던 말들, 그 말들 중에서 시준에게 필요한 말들을 골라 뱉었다. 열이 올라 씩씩대는 호흡과 시뻘게진 얼굴을 시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미영은 발길을 재촉했다. 시준은 그런 미영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 지금껏 자신이 알던 미영이 아닌 것 같은 모습에 놀라 벙찐 것도 있었지만 미영이 이 일이 잘 못됐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미영이 진심으로 이 일을 '좋게' 생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시준은 소름이 끼쳤다. 새삼 세상에 이상한 사람 많다는 말을 절실히 공감하는 시준이었다.


1월 1일 새해 첫날, 모든 사람들이 새 출발의 마음을 먹는 그날에 미영은 하나의 인연을 정리했다. 그리고 그것은 앞으로 정리될 무수히 많은 인연들의 시작이었다.



월, 화, 수, 목, 금, 토,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