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온 시준은 겨우 버텨온 몸뚱이를 해방시켜 침대 위로 쓰러졌다. 평소라면 외출복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쓰러지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세균의 찝찝함 따위는 지금의 상태에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 오늘은 이별을 한 날이었다. 생전 이런 이별은 어디서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다단계 때문에 이별이라니. 시준은 천장을 멀뚱멀뚱 바라보며 오늘의 사건을 곱씹어 보았다.
미영의 '좋은 세미나가 있는데 같이 갈래?'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고, 평소 미영의 씀씀이를 보면서 벌이가 괜찮음을 눈치챘기에 선뜻 따라나선 것은 시준이었다. 1월 1일이라는 날짜가 조금 걸리기는 했지만 부자들에게 평일과 쉬는 날이 따로 있겠나 싶었다. 오히려 쉬는 날에 빈둥대는 대신 세미나를 듣는다는 것이 갓생을 살아가는 청년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세미나 장은 서울의 중심 강남, 그것도 으리으리한 빌딩이 빼곡히 세워져 있는 역삼동의 한 빌딩이었다. 빌딩의 외관과 인테리어는 새로 지어진 것처럼 깨끗했다. 빌딩의 입구에 선 미영은 빌딩의 꼭대기에 적힌 'HSH'라는 글씨를 가리키며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게 우리 회사야."
시준은 처음 들어보는 상호에 당황했지만 자신이 알지 못하는 회사가 이런 큰 빌딩을 소유하고 있다면 대체 얼마나 돈을 잘 벌고 있다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 회사의 세미나가 열리는 곳에 와 있다는 것에, 그리고 새로운 기회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살짝 흥분되기 시작했다.
세미나 장에 들어섰을 때 30여 명의 사람들이 저마다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고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들의 공통점은 표정에 그늘진 곳이 없었다. 모두가 비즈니스 슈트를 입고, 사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은 외국 영화에서 봤던 무도회장 같은 곳을 연상시킨다고 시켰다. 누군가 미영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미영은 '잠시만, 아 저기 입구에 짐 보관해 줄 거야. 맡기고 있어.'라는 말을 남긴 채 그 사람을 따라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게 된 시준은 조금씩 흥분되는 마음을 주체하려 노력하며 주위를 조심스레 둘러봤다. 미영이 말한 세미나장 입구 옆쪽으로 미용실에서나 볼 법한 케비넷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어 '여기가 짐을 보관하는 곳입니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짐 보관소 옆에는 직원이 역시나 그늘하나 없는 상냥한 미소로 맞아주고 있었다. 시준은 그 직원에게 다가가 짐을 보관할 수 있는지 물었다. 직원은 당연하다는 듯 시준의 짐과 겉 옷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직원은 자연스럽게 간식이 비치된 장소를 안내해 주었다.
시준이 간식을 바리바리 집어 들고 세미나장의 가장 구석진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직까지 시준에게 누군가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고, 시준도 누군가에게 말을 걸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렇게 한동안 멀뚱하게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던 차에 미영이 시준을 찾아왔다.
"어때? 분위기 괜찮지?"
"응 그러네, 사람들도 다 친절하고, 먹을 것도 많아. 좋네, 잘 따라왔어."
시준의 긍정적인 대답에 미영은 마음이 한결 놓였다.
"거봐 내가 뭐랬어? 분명 좋아할 거라고 했잖아."
"근데 여기 뭐 하는 곳이야?"
시준의 질문에 조금 당황했지만 미영은 내색하지 않으려 더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들어보면 알지! 곧 세미나 시작이니까 기다려 봐"
시준은 미영의 얼굴에서 살짝이지만 당황하는 기색이 스쳐갔다고 생각했지만 워낙 찰나였기에 별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아침을 먹고 오지 않았던 시준은 다시 간식을 해치우는데 집중했다. 시간이 좀 더 흐르고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 착석하기 시작했고, 연단에서 누군가 올라섰다. 세미나장의 앞쪽에 앉은 사람들 사이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큰 박수와 호응이 나왔다. 연단 위의 사람은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하고 마이크를 당겨 자신이 HSH의 대표 홍석현이라고 소개했다. 이번에는 앞쪽 사람들 뿐만 아니라 여기저기서 큰 박수와 호응이 나왔다.
"저분이 우리 대표님이야."
미영은 상기된 목소리로 한번 더 대표를 소개하며 누구보다 열심히 박수를 쳤다.
"오늘 이렇게 새해부터 자리해 주신 여러분 정말 감사드립니다.... "
뻔한 새해 인사로 시작된 대표의 세미나는 시작부터 좌중을 장악해 갔다. 자신의 나이가 20대 후반일 때 사업을 시작했고, 시작한 지 3년이 안돼서 롤스로이스를 타고 다닌다고 했다. 심지어 기사도 있다고 했다. 집은 용산에 있는 누구나 알만한 부자동네에 살고 있고, 예전에 갤러리를 했던 공간이라 집이 정말 으리으리하다고 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누구나 자신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으며 자신은 부족한 것이 이젠 없기에 사람들에게 자신이 돈을 벌었던 방법을 알려주는 것을 알려주고, 사람들을 자신과 같은 삶을 살아가게끔 돕는 것을 자신의 삶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대표의 자랑을 경계하던 사람들은 대표의 젊잖은 태도와 말투, 신뢰감 있는 목소리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을 들으면서 하나 둘 대표를 신뢰해 갔다.
그렇게 대표라는 사람의 자기 자랑이 한창일 때 시준은 세미나 장의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갔다 들어오는 것을 확인했다. 처음에는 화장실을 가려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나름의 순번이 있듯 차례차례 사람들이 자리를 비웠다. 그리고 시준의 차례가 되었다. 누군가 시준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뒤를 돌아본 시준은 아까 짐 보관소에서 옷을 받아 든 직원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잠시만요. 설명드릴 게 있어요."라는 말을 던지며 직원은 예의 그 미소를 지었다. 어찌할지 모르겠던 시준은 미영을 쳐다봤다. 미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리며 다녀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시준은 뭔가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직원을 따라나섰다. 직원은 세미나 장 밖에 따로 마련된 공간으로 안내했다. 공간 안에는 원형 테이블이 있었고, 직원가 다른 사람 둘이 따라 들어왔다. 직원은 시준에게 의자 하나를 안내하며 편하게 앉으라고 했다. 같이 들어온 사람들 중 하나가 음료를 내려놓았고, 다른 한 명은 태블릿 내려놓았다. 시준은 태블릿을 힐끗 쳐다보았다. 살짝 봤지만 웹사이트 회원 창 같은 것이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직원은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를 던지더니 태블릿을 보여주며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게 저희 회사의 폐쇄몰이에요. 혹시 폐쇄몰이라고 들어보신 적 있나요? "
"아니요."
시준은 경계를 하려는 듯 짧게 대꾸했다.
"이게 뭐냐면 저희 회사 사람들만 가입을 하는 건데요. 이 안에서는 보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일반적으로 소비하는 대부분의 물품들이 등록되어 있고, 아주 저렴하게 구매하실 수 있어요."
직원이 보여주는 페이지를 힐끗 쳐다보며 시준은 상품들의 가격을 눈으로 스캔했다. 마트에 장 보러 갈 일이 없던 시준이 봐도 상당히 저렴한 수준의 가격들이었다.
"저렴하긴 하네요."
직원이 어떤 대꾸를 원하는 눈치였기에 시준은 짧게 대꾸했고 직원은 시준의 말에 바로 대응했다.
"그렇죠? 저렴하죠. 시준님도 회원가입을 하시면 이걸 이용하실 수 있어요. 여기 보이시는 이곳에서 회원가입을 해주시고 가입비를 입금해 주시면 됩니다. "
"가입비요? "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가입비'라는 말을 자연스레 던진 직원에게 그것은 대수로운 것이라는 투로 시준은 되물었다.
"아, 네 설명을 드리려고 했는데요. 저희가 가입비가 있습니다. 근데 이게 절대 시준님이 손해를 보는 내용은 아니시고요...."
"얼만데요?"
직원의 말이 길어지는 것이 자신에게 손해를 끼치는 일임을 본능적으로 느낀 시준은 직원의 말을 끊고 물었다.
"아 가입비는 저희가 폐쇄몰 내에서 사용할 수 있는 포인트로 지급을 해드리고... "
"그래서 얼만데요?"
시준은 다시 한번 직원의 말을 끊고 물었다.
"80만 원입니다. "
"80이요...?"
시준의 당혹스러움을 눈치챈 직원은 재빨리 말을 이어나갔다.
"네, 그런데 이게 네트워크 마케팅이라는 구조인데요. 시준님이 절대 손해를 보시는 구조가 아니에요. 일단 가입비의 80%에 해당하는 포인트를 지급해 드리고 시준님이 다른 사람 3인에게 저희 몰을 소개해 주시면 그때부터는 5%씩 포인트 적립이 느는 구조예요. 그리고 아까 보셨다시피 저희 몰에서 판매가 되는 제품들이 아주 저렴한 가격에 판매가 되고 있기 때문에 80%의 포인트만 사용한다고 해도 시준님께서는 절대 손해를 보는 구조는 아니죠."
직원은 시준에게 자신의 설명에 대한 동의를 얻으려는 듯 시준을 쳐다봤다.
"아... 이해는 했어요."
시준의 대답에 자신감을 얻은 직원은 태블릿을 회원 가입창으로 다시 돌려놓으며 말했다.
"여기 가입해 주시면 됩니다."
시준은 회원 가입창을 바라보고, 다시 폐쇄몰 화면으로 돌려서 상품들을 하나하나 살펴봤다. 직원의 표정에서 조금 전 보다 훨씬 깊은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