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나중에 할게요.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할 거 같은데, 집에 가서 생각 좀 해볼게요."
비즈니스 모델을 이해는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구석이 있음을 느낀 시준은 나중에 가입하겠다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회원가입을 권유하던 직원의 입가에서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고, 옆에 앉아 있던 두 직원들의 표정도 무겁게 변했다. 세 사람이 만들어내는 무거운 분위기가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 순간 나머지 직원들의 임무가 무엇이었는지 시준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너무 좋은 기회라니까요. 절대 손해 보는 일 없을 거예요. 제가 확신해요."
"아 그건 알겠는데요. 너무 갑자기 들어서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해요."
"일단 그럼 가입부터 하고, 회비부터 내고 생각해 보는 걸 어떨까요? 저희가 가입일 기준으로 1주일은 무조건 100% 환불을 해드리고 있거든요."
"환불을 할 거라면 굳이 가입하지 않겠죠."
나름의 정중한 거절에도 계속되는 권유에 짜증이 치민 시준은 딱 잘라 싫은 내색을 숨기지 않고 딱 잘라 말했다. 그럼에도 직원의 권유는 끝나지 않았다.
"제가 정말 기회가 아까워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나중에 가입하게 되면 상품들 가격도 올라가고, 대부분 가입하신 분들이 시준님 같은 경우에 나중에 많이들 후회하시더라고요. 또..."
직원의 권유가 길어지자 더 이상 듣고 있기 어려웠던 시준이 말을 끊었다.
"말씀하신 대로 정말 좋다면 제가 집에 가서 생각해 보고 다시 가입을 하겠죠. "
"집에 가서 가입을 하실 거라면 여기서 하고 가시는 게 좋죠."
직원의 권유가 이제 말이 통하지 않는 상황으로 전개됨을 느낀 시준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이제 돌아가봐야 할 것 같은데요."
나가려던 순간 짐을 맡겨 놓았다는 것이 생각난 시준은 아차 싶었다.
"짐을 좀 찾아주세요."
"아직 얘기가 다 안된 거 같은데요. 일단 얘기를 더 들어보시고"
"짐 달라니까요!"
순간 이게 다 계획된 상황이었음을 감지한 시준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직원들은 잠시 당황은 했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평정을 찾았다. 그 모습이 시준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짐 달라고요! 나가야 된다고!"
직원들은 아무 말 없이 시준을 바라볼 뿐이었다. 시준은 얼굴이 벌게졌고, 호흡이 진정이 되지 않아 씩씩 거렸다. 직원들이 아무 반응이 없자 시준은 더 크게 행동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들고 케비넷이 위치한 곳으로 갔다.
"내놓으라고 씨발!!"
시준은 욕설을 내뱉으며 들고 있던 의자를 머리 위로 들더니 케비넷을 향해 던졌다. 와장창 굉음과 함께 의자는 등받이 한쪽이 부러졌고, 케비넷은 부딪친 자리가 움푹 파였다. 케비넷 옆에 있던 유리 테이블도 의자에 부딪혀 넘어지며 '와장창'이라는 효과음을 만들어 주었다. 이번에는 직원들도 예상치 못했는지 시준을 쫓아 나와 놀란 눈으로 시준을 바라봤다.
"내가 가방 달라고 했지! 내놓으라니까 씨발!!"
시준은 직원들을 향해 다시 소리쳤다. 주변 사람들이 웅성거렸고, 눈치를 보며 말려야 하는지 아니면 시준을 제압 해야 하는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로 시준을 예의 주시 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한 중년의 사내가 시준에게 다가왔다. 백발에 가까운 흰머리를 올백으로 넘긴 중년의 사내는 한눈에 보아도 어느 정도 높은 레벨의 사람으로 보였다.
"불편한 게 있으신가요?"
"짐 달라고요. 쪼옴!"
직원들이 시준의 옆으로 와서 백발의 사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중년의 사내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주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친절하게 시준을 응대했다.
"이런, 저희 직원들이 실수를 저지른 모양이군요. 뭔가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얼른 짐 찾아드려요."
백발의 사내는 주변 사람들에게 들으라는 듯이 '오해'라는 단어에 힘주어 말했다. 그것으로 이 사단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한 고객이 '오해'때문에 발생한 사단으로 치부되어 버렸고, 시준은 '오해' 때문에 화를 주체하지 못한 진상이 되었다. 이런 사려 깊은 배려(?)를 시준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어쨌든 자신의 짐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직원들은 서둘러 시준의 짐을 찾아 주었고, 시준은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인사도 없이 씩씩거리며 세미나장을 나섰다.
이 소란을 전해 들었던 미영이 시준을 쫓아 나왔고, 강남 한복판에서 다투다 헤어진 연인의 주인공이 되었다. 시준은 미영이 이해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 상황이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건지, 어떻게 하면 자신을 그곳에 데려갈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진 시준은 책상에 앉아 HSH라는 기업을 검색했다. 먼저 기업의 홈페이지에는 유통사업을 하는 번듯한 이미지로 보였다. 그 밖에 다른 정보는 구하지 못했다. 어떻게 요즘 세상에 인터넷에 이렇다 할 정보가 없는 회사가 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SNS도 하지 않았고, 그 흔한 기업 뉴스 기사도 단 한 건도 찾지 못했다. 별다른 소득이 없자 시준은 '다단계'에 대해 검색하기 시작했다. 다단계에 대한 정보는 꽤 많이 있었다. 그중에서 조회수가 높은 다큐멘터리 영상 몇 개와 시사칼럼 몇 개를 골라 한참을 들여다보며 시준은 이 상황이 꽤 심각한 상황이었고, 자신이 엄청난 위험에 빠질뻔했다는 생각에 소름이 돋았다.
무엇보다 미영에 대한 생각이 들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른 체 빠져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 어쩌면 지금 빠져나오지 못한 것은 아닌지, 자신을 그곳에 데려간 이유가 혹시 자신을 그 구렁텅이에서 구해달라는 의미는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에 미치자 시준은 참지 못하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누나, 혹시 이런 거 봤어?]
마음이 급해진 시준은 미영에게 자신이 찾아본 다큐멘터리 영상과 시사칼럼의 링크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