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영은 엉망인 기분으로 세미나장을 다시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사실 미영의 기분보다도 더 꺼려졌던 것이 있었다. 생소한 비즈니스 모델이었기에 세미나장에서 '오해'로 인한 소란은 비일비재했다. 그럴 때마다 미영은 속으로 '어디서 저런 사람을 데려왔을까.'라는 핀잔을 하곤 했다. 오늘 시준의 소란 덕분에 자신이 그 주인공이 될 줄은 모르고 말이다.
미영은 이 모든 일이 시준 때문이라 생각했다. 데려오기 전에 미리 귀띔이라도 해줄걸 했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동안 얼마나 많이 봐왔던가 자신이 먼저 얘기를 꺼내면 끝까지 듣지도 않고 꺼려하던 그 표정들을. 그래도 세미나까지 데려온 사람 중에는 문제를 일으킨 사람은 없었는데. 시준이 그렇게 갑자기 미친놈처럼 돌변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특히 미영을 향하던 그 눈빛과 말투는 뭐란 말인지. 그동안 연하라고 살뜰히 아껴준 것은 모르고. 배은망덕한 녀석, 천하의 나쁜 녀석이라는 말로도 부족했다. 꼭 더 한 말을 생각해 두어야겠다고 다짐한 미영이었다.
미영은 집으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혹시나 시준에게서 연락을 왔을까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내봤지만 민망하게도 아무 연락도 없었다. 미영은 창밖을 바라봤다. 새해 첫날 데이트를 즐기는 커플들만 보였다. 자신도 시준의 '오해'만 없었더라면 저렇게 행복한 표정을 지으며 새해 첫날을 보내고 있을 텐데. 시준에 대한 원망과 커플에 대한 부러움으로 희망찬 미래를 상상할 때쯤 미영은 집에 도착했다.
집에 도착한 미영은 가방과 외투를 바닥에 아무렇게나 팽개치고는 침대로 쓰러졌다. 그리고 오는 내내 발걸음을 재촉하며 겨우 꾹 참아냈던 눈물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시준에 대한 원망이었지만 곧 자신에게로 비난을 쏟아냈다. 팔자가 어쩜 이렇게 기구한지. 행복하려고 애쓰고 노력할수록 항상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은 자신에게 시련을 줬다. 잊지 않고 꼬박꼬박.
한참을 울던 미영은 억지로 자신을 다독이며 그만하기로 했다. 엄마가 돌아올 시간이 곧 돌아오기 때문이었다. 새해 첫날부터 딸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요즘따라 생기가 돈다며 밝은 모습이 보기 좋다는 말을 들었던 게 오늘 아침이었다. 흐르는 눈물을 억지로 참아내며 세수를 했다. 번진 마스카라와 눈물자국은 지웠지만 붉게 충혈된 눈과 살짝 불어 오른 누두덩이는 어찔할 수 없었다. 거울을 보며 다시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애써 다른 생각을 하기로 했다. 저녁에 엄마랑 맛있는 거 먹으러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겨우 해낸 미영은 핸드폰을 열어 동네 맛집을 찾았다. 문 닫은 가게들을 보면서 '요즘 자영업자 어렵다더니 먹고살만한가 보네 휴일이라고 죄다 문을 닫아?'라며 핀잔을 했다. 그때, 시준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미영은 심장이 쿵쾅거렸다. 시준에게 다시 메시지가 올 거라곤 생각을 못했다. 와도 내일이나, 아니 다음 주나 다음 달이 될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시준에게 했던 모멸찬 말들이 생각나 미안했다. 미영을 재빠르게 시준의 메시지를 열었다.
[누나, 혹시 이런 거 봤어?]
그리고 몇 개의 링크들. 미영은 시준이 보내온 각 링크의 제목만 보고도 알았다. 그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보내온 링크들과 다르지 않았고, 새로운 것은 하나도 있지 않았다. 미영은 자신의 기대가 너무 부끄러웠고, 시준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다는 것에 화가 났다. 다시 울음이 터지려는 것을 억지로 막았다. 그리고 시준의 메시지에 답을 적어내기 시작했다.
[어쭙잖은 충고를 하고 앉았네. 이런 거 보낼 시간에 니 앞날이나 걱정을 해. 그리고 다단계 아니고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몇 번을 얘기해. 학습능력이 없는 거니 인지능력이 없는 거니. 그도 아니면 공감 능력이 없나? 왜 남의 일에 까지 신경을 써? 너 앞날이나 잘 걱정해.]
미영은 한번 더 읽어 보지도 않은 채로 샌드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화가 가시지 않았는지 다시 메시지를 적어나가기 시작했다.
[설령 다단계라고 쳐. 그게 머 어때서? 너처럼 맨날 집에서 빈둥대는 것 보다야 훨씬 낫지 안 그래? 뭐라도 일을 해야지. 안 그렇냐고? 남자라면 능력이 있어야지 개쪼다 같은 게 맨날 밥 사주고, 모텔비 내던 게 다 어디서 나온 돈인데 그것도 모르고 훈수질이야? 그냥 살던 대로 평생 살아라 쪼다새끼야]
이번에는 아까보다도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샌드 버튼을 눌렀다. 더 이상 눈물은 나오려 하지 않았다. 분노의 대상 앞에서 억울함과 미안함은 전투력으로 변해 있었다. 미영은 아드레날린이 거칠게 분비되고 있다는 것을 세포 하나하나로부터 느끼고 있었다. 미영의 메시지는 시준이 차단이라는 수를 둘 때까지 계속되었다. 새해 첫날 완벽하게 두 사람은 정리가 되었고, 둘 모두에게 미련이 남지 않는 아름다운 마무리가 되었다.